[설왕설래] 국민소득 4만달러 벽

한국은 기이하게도 국민소득 ‘고지’를 밟을 때마다 재앙이 찾아왔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 1만달러를 돌파했지만 2년여 만에 외환위기가 덮쳤다. 당시 김영삼정부가 1만달러 사수에 집착, 저환율 정책을 폈는데 급격히 불어난 경상 적자가 화근으로 작용했다. 11년 후에도 2만달러 시대가 시작됐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탓에 2∼3년 후 2만달러가 무너졌다.

달러 표시 국민소득은 국가의 위상을 보여주는데 역대 정부는 이 지표의 상승에 집착하다 화를 키우기 일쑤였다. 이명박정부는 ‘7·4·7공약’(7% 성장, 1인당 소득 4만달러, G7 진입)을, 박근혜정부는 ‘4·7·4정책’(잠재성장률 4%, 고용률 70%, 1인 소득 4만달러)을 제시했다. 문재인·윤석열정부도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핵심공약으로 내놓았지만 모두 공염불에 그쳤다. 국민소득은 2014년 3만달러를 처음 넘어섰지만 12년째 갇혀 있다.



4만달러 시대가 현실로 다가온 모양이다. 재정경제부 등에 따르면 올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9164달러로 추산됐고 내년에는 4만1024달러에 이를 전망이라고 한다. 인공지능(AI)발 반도체 초호황 덕분이다. 이재명정부는 오는 2030년까지 ‘3·4·5비전’(잠재성장률 3%, 수출 4강, 국민소득 5만달러)까지 내놓았다. 4만달러까지 10년 이상 걸렸는데 불과 4년 내 5만달러 벽도 넘겠다는 야심 찬 청사진이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다. 반도체는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사이클 산업인데 AI 거품이 꺼지면 4만달러도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경제학계에서는 3만달러까지 후발주자의 모방과 효율로 성장이 가능하지만, 이후에는 세상에 없던 가치를 만드는 혁신 없이는 도약이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일본은 무려 34년째 3만달러 늪에 빠져 있다. 1992년 3만달러 돌파 이후 3년 만에 4만달러를 웃돌았고 2012년 5만달러까지 육박했지만 이후 추락을 거듭했다. 구조개혁에 소홀한 채 팽창재정과 엔저, 초저금리와 같은 경기부양책에 기댄 탓이 크다. 한국 경제도 반도체 착시에 취해 체질 개선에 미적대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전철을 밟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