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도 물도 필요 없다”…기후 위기 정면 돌파 ‘카베르네 제왕’ 케이머스의 타짜 본색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③하이브리드 품종 개발 케이머스 빈야즈>

나파밸리 인근 수이선에 케이머스-수이선 설립

포도밭 전체가 기후변화 대응 거대한 실험장

기후변화·병충해 저항 강화 PIWI 상업화 박차

 

케이머스 빈야즈 찰리 와그너(왼쪽), 제니 와그너.  최현태 기자

나파밸리의 케이머스 빈야즈(Caymus Vineyards)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제왕’으로 불립니다. 저명한 와인 전문 매체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에서 케이머스 카베르네 소비뇽이 올해의 와인 1위에 두차례나 선정됐을 정도로 빼어난 품질을 자랑합니다. 그런 케이머스는 요즘 가장 공들이는 포도밭이 있습니다. 바로 나파밸리 인근의 수이선 밸리로, 케이머스는 이곳을 거대한 실험실 삼아 기후변화 위기를 뛰어넘을 하이브리드 품종 와인 상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케이머스 수이선 전경. 최현태 기자

◆농부에서 와인 생산자로

 

케이머스를 일군 와그너(Wagner) 가문은 1850년대부터 나파 밸리에 뿌리를 내린 농부 집안입니다. 케이머스를 창립한 찰리 와그너(Charlie Wagner)의 아버지 칼 와그너(Carl Wagner)가 1906년 러더포드(Rutherford) 땅을 매입해 호두, 자두, 포도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는 와그너 가문이 키운 포도가 당시 나파 밸리의 명문 와이너리 잉글눅(Inglenook)에 전량 납품될 만큼 품질을 인정받았습니다. 이에 1960년대 들어 찰리와 아내 로나 벨 글로스(Lorna Belle Glos)는 과수원을 걷어내고 미래 가치가 높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합니다.

 

왼쪽부터 찰리, 로나, 척 와그너. 홈페이지

전환점은 1971년 찾아옵니다. 포도를 판매만 하던 찰리와 로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살 아들 척(Chuck)과 케이머스 빈야즈를 설립해 자신의 와인을 직접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름은 와이너리가 위치한 러더포드 땅이 과거 멕시코 통치 시절 조지 캘버트 욘트(George Calvert Yount, 1794~1865)가 하사받은 토지 문서상의 지명 ‘랜초 케이머스(Rancho Caymus)’에서 따왔습니다. 욘트는 나파 밸리 최초로 포도나무를 심은 인물로, 나파 밸리의 유명 산지 욘트빌(Yountville)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습니다.

 

척과 제니 와그너. 페이스북
케이머스 플래그십 스페셜 셀렉션. 최현태 기자

1972년산 포도로 빚어 이듬해 출시한 첫 카베르네 소비뇽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케이머스는 전설적인 첫걸음을 뗐습니다. 초기에는 전설적인 양조가 앙드레 첼리스체프(André Tchelistcheff)의 자문을 받다, 1975년 나파밸리의 유명 와인메이커 랜디 던(Randy Dunn)을 영입하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습니다. 그해 찰리와 척 부자는 숙성 중인 오크 배럴 가운데 유독 품질이 뛰어난 몇 개를 따로 모아 장기 숙성시킨 와인을 선보였는데, 바로 케이머스의 플래그십 ‘스페셜 셀렉션(Special Selection)’입니다. 와인 스펙테이터는 1989년(1984년 빈티지)과 1994년(1990년 빈티지) 이 와인을 1위인 ‘올해의 와인(Wine of the Year)’으로 선정했는데 이 상을 두 번 받은 것은 케이머스가 유일합니다.

 

케이머스 50주년 레이블. 홈페이지
케이머스 와인.  최현태 기자

척은 1984년부터 와이너리의 포도 재배와 양조를 총괄하고 있으며 2002년 찰리가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뒤에도 와이너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케이머스는 다른 와이너리보다 포도를 나무에 훨씬 오래 매달아 두어 완숙 직전에 수확하는 ‘행 타임(Hang Time)’ 방식을 고수하는데, 이를 통해 타닌은 부드러워지고 풍부한 과실 풍미와 묵직한 바디감을 지닌 이른바 ‘케이머스 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현재 척 와그너의 자녀인 찰리(Charlie Jr.)와 제니(Jenny)가 4대째 와인메이커로 참여해 가문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이들은 와이너리 설립 50주년을 맞은 2022년 나파 밸리 인근 수이선 밸리에 진출해 케이머스-수이선(Caymus-Suisun) 와이너리를 새로 열었습니다. 또 보난자(Bonanza)·에몰로(Emmolo)·메르 솔레이(Mer Soleil) 등 다양한 브랜드 라인업도 성공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나파밸리 주요 산지와 수이선 밸리 위치(오른쪽 하단). TTB
케이머스 수이선 전경. 최현태 기자

◆수이선 밸리는 거대한 실험실

 

나파밸리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30분 정도 달리면 케이머스-수이선에 닿습니다. 찰리와 제니 남매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야자수가 도열하고 장미꽃이 만발한 와이너리는 고즈넉한 휴양지에 온 듯 아름답네요. 남매를 따라간 포도밭에는 처음 들어보는 품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적응력과 병충해 저항성을 강화한 PIWI 품종들입니다. 제니는 “수이선 밸리의 와이너리 부지와 인접한 포도밭을 실험 구역으로 삼아 UC 데이비스와 함께 교잡 품종을 시험 재배하고 있습니다. 케이머스는 대학의 실증 연구에 참여하는 실험 와이너리 역할을 맡아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고, 장기적으로 어떤 성과를 내는지 관찰합니다. 지금까지는 특히 레드 품종 카베르네 볼로스와 화이트 품종 소비뇽 크레토스가 큰 성과를 내고 있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제니(왼쪽)와 찰리 와그너. 최현태 기자

카베르네 볼로스(Cabernet Volos)는 이탈리아 우디네 대학·응용유전학연구소(IGA)의 육종 프로그램에서 2002년 카베르네 소비뇽과 내병성 교잡 대목 ‘코즈마(Kozma) 20-3’을 교배해 만든 품종입니다. PIWI 품종 특유의 높은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혈통 비율을 지니고 있어 카베르네 소비뇽 고유의 짙은 색상과 풍부한 타닌, 검은 과실향, 복합적인 풍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노균병과 흰가루병 저항성을 지녔습니다. 또 생육이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더 빠르고 가뭄과 더위에 강해 기후변화가 심한 환경에서도 품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케이머스는 몇 해 전 양조팀이 이탈리아의 묘목장 비바이 코오퍼라티비 라우셰도(Vivai Cooperativi Rauscedo·VCR)를 찾아 이 교잡 품종으로 만든 수백 종의 시험 와인을 직접 시음한 뒤 도입을 결정했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홈페이지

소비뇽 크레토스(Sauvignon Kretos)도 우디네 대학·IGA 프로그램에서 소비뇽 블랑과 코즈마 20-3을 교배해 만들었습니다. 시트러스와 풋사과 향 등 소비뇽 블랑의 개성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산미가 더 날카롭고 신선합니다. 포도송이를 말려 죽이는 노균병 같은 곰팡이 질환에 강해 농약을 거의 쓰지 않고도 건강하게 자랍니다. 찰리는 “이 와인은 1년 전 실제로 병입까지 마쳤습니다. 제 생각에는 풍미가 소비뇽 블랑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만약 아무 정보 없이 마신다면 소비뇽 블랑이라고 여길겁니다. 다만 2025년 빈티지는 수확기 포도밭에서 다소 문제가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를 너무 많이 달리게 한 탓에 풍미가 다소 풋내를 띠게 됐고, 결국 이 빈티지는 병입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수이선 밸리는 포도 생육 기간(4~10월) 섭씨 10도가 넘는 일평균 기온을 누적 합산한 윙클러 지수 1~5 지역 중 3지역에 속하는 온화한 곳으로 생육 기간 동안 흰가루병 방제를 위해 약 7차례 살균제를 살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카베르네 볼로스와 소비뇽 크레토스 실험이 성공하면 이 포도밭에서는 약제를 전혀 살포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열매 맺기 시작한 케이머스 수이선 하이브리드 포도.  최현태 기자

 

 

◆피어스병에 강한 품종은 강가에 시험 재배

 

케이머스-수이선이 해결하고 싶은 또 다른 과제는 포도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피어스병입니다. 이를 위해 별도로 피어스병 저항성을 가진 교잡 품종을 확보해, 나파 밸리의 강이나 개울 주변 포도밭에 완충지대 형태로 10~15줄씩 심어 병 확산을 막는 데 활용하고 있습니다. 숙성도 빠르고 맛도 좋다는 평가지만, 아직은 학술적인 품종명이 복잡해 소비자용 라벨에 쓰기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제니는 “누군가 더 친숙한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와인 산업에서 이런 교잡 품종을 본격적으로 상품화한 사례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합니다.

 

제니 와그너. 최현태 기자

케이머스-수이선의 실험 포도밭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특징은 관개용 호스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이선 밸리 계곡 평지에 위치한 대부분의 포도밭은 별도의 관개 시설 없이 재배됩니다. 포도나무를 심은 첫해에만 손으로 물을 주고, 이후에는 거의 관개하지 않습니다. 찰리는 “T-프로브(T-probe)라는 장비를 사용합니다. 물을 가득 실은 탱크를 트랙터에 연결하고 포도나무 옆에 직경 약 ¾인치의 프로브를 땅속 깊이 찔러 넣은 뒤 물을 직접 주입합니다. 이렇게 하면 물이 뿌리까지 깊숙이 전달되고, 뿌리는 그 물을 따라 더 깊은 곳으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케이머스-수이선 포도밭은 지금 9~10년 정도 되었는데, 처음 2년만 물을 공급했고 이후에는 거의 관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수확기에는 마치 꾸준히 물을 준 것처럼 포도나무가 건강하고 왕성하게 자랍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찰리 와그너. 최현태 기자

수이선 밸리는 나파 밸리보다 땅값이 훨씬 저렴해 이처럼 다양한 품종을 자유롭게 시험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아마로네를 만드는 코르비나(Corvina)·코르비노네(Corvinone)·론디넬라(Rondinella) 등 여러 이탈리아 품종도 함께 시험 재배하고 있습니다. 제니는 “4년 전 식재한 이 포도밭은 2025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수확을 했는데, 네로 다볼라(Nero d'Avola)는 정말 좋은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반면 네그로아마로(Negroamaro)는 기대를 많이 했지만 아직은 원하는 수준의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케이머스-수이선 그랑 뒤리프. 페이스북

▶케이머스-수이선 그랑 뒤리프(Caymus-Suisun Grand Durif)

 

수이선 밸리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품종으로 만든 케이머스-수이선의 넘버원 플래그십 레드 와인입니다. 품종은 쁘띠 시라(Petite Sirah) 100%입니다. 뒤리프(Durif)는 쁘띠 시라의 옛 이름으로, 1880년대 프랑스 론에서 캘리포니아로 건너오며 지금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그랑(Grand)을 붙인 것은 케이머스 특유의 양조 스타일을 접목해 본래 거칠고 타닌이 강한 쁘띠 시라를 놀랍도록 리치하고 유연하게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짙은 잉크 빛깔을 띠며 블루베리 잼과 블랙 자두, 잘 익은 제비꽃 향이 폭발합니다. 입안에서는 에스프레소와 카카오, 다크 초콜릿의 달콤 쌉싸름한 풍미와 함께 촘촘하고 부드러운 타닌이 묵직한 바디감을 완성합니다.

 

케이머스-수이선 더 워킹 풀. 최현태 기자

▶케이머스-수이선 더 워킹 풀(Caymus-Suisun The Walking Fool)

 

매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직관적이고 경쾌한 스타일로 진판델(Zinfandel)과 쁘띠 시라(Petite Sirah)를 블렌딩했습니다. ‘더 워킹 풀(걸어 다니는 바보)’은 제니의 고조부 요하네스 글로스(Johannes Glos)를 기리며 지은 이름입니다. 1880년대 나파 밸리에 정착한 그는 늘 걸어서 여행을 다녀 동네 사람들에게 정겹게 이 별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신선한 라즈베리와 크랜베리 같은 붉은 과실의 생동감 넘치는 산미가 중심을 이루고, 여기에 진한 에스프레소 힌트와 시가 박스·삼나무 향이 더해져 매끄러운 텍스처와 함께 기분 좋은 여운을 남깁니다.

 

케이머스-수이선 베이 로제. 페이스북

▶케이머스-수이선 베이 로제(Caymus-Suisun Bay Rosé)

 

와이너리가 위치한 수이선 밸리 남단, 샌프란시스코만의 서늘한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로 양조한 프리미엄 로제 와인입니다. 그르나슈(Grenache) 100%로, 수이선 밸리에서도 가장 서늘한 해양성 기후를 가진 밭에서 소량 생산됩니다. 은은한 구리 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로즈 골드 색상을 띱니다. 흰복숭아와 신선한 딸기, 잘 익은 수박의 싱그러운 과실 향이 입안에서 군침을 돌게 하는 청량한 산미와 함께 깔끔하게 떨어집니다.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④에서 계속>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