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역사 잊지 않겠다”…한국 고교생들, 히로시마에서 ‘평화’를 말하다 [밀착취재]

2026 동북아활성화 역사문화 교류 행사 둘째 날
평화기념공원 등 방문…日에이신고 학생 8명 동행
한국인 위령비 앞서 묵념…평화 지키는 사람 될게요”

윤슬이 빛나는 모토야스강과 앙상한 철골의 원폭돔, 군국주의라는 ‘가해’의 역사와 원자폭탄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피해’의 기억. 묘한 대비를 이루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 고교생들은 역사의 역설과 마주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2026 동북아활성화 역사문화 교류 행사 둘째 날인 20일, 대전 만년고등학교의 한일역사교류 동아리 ‘휴먼링크’ 학생들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이날은 일본 후쿠야마 에이신고등학교 학생 8명도 동행해 평화의 등, 원폭사망자 위령비, 원폭돔을 직접 안내했다.

 

대전 만년고등학교의 한일역사교류 동아리 ‘휴먼링크’ 학생들과 일본 후쿠야마 에이신고 학생들이 20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과 원폭돔을 방문했다. 

히로시마는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미군이 ‘원폭 효과를 검증하기 적합한 도시’로 판단해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한 도시다. 폭발 한 번으로 도시 건물의 약 70%가 무너졌고, 8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생들의 발걸음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였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등으로 히로시마에 살던 조선인 약 3만명이 원폭으로 희생됐다. 고종의 손자인 이우 왕자도 이곳에서 피폭돼 숨졌다. 위령비는 일본 사회의 반대로 한동안 평화공원 밖 강변에 세워져 있었지만,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1999년 지금의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학생대표 이유리 양이 헌화를 마친 뒤 준비해 온 편지를 읽기 시작하자 현장은 이내 숙연해졌다.

 

“너와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아픔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 마음이 너무 아파. 나는 지금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평화는 너와 같은 수많은 희생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 오늘 이 자리에는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함께 서 있어. 우리는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만났어.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기억하며,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너에게 전하고 싶어.”

 

편지를 통역하던 이승훈 동북아역사재단 현지 코디네이터는 목이 메었고, 교사들도 말없이 눈가를 훔쳤다. 일본 학생들도 고개를 숙인 채 경청했다.

 

공원을 나서는 학생들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전날 일본군이 중국 침략전쟁을 위해 비밀리에 독가스를 제조했던 오쿠노시마를 둘러본 직후였기 때문이다. 불과 하루 새 일본의 전쟁범죄 현장과 피해 참상을 잇달아 마주한 학생들은 “원폭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이 또 다른 제노사이드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던 것 아닌가”라며 본질적인 의문을 던졌다.

 

김다은 양은 “어제 독가스섬을 갔을 때와 괴리가 느껴진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도우면서 미래로 나아가려면 이러한 역사의 이면을 모두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박지민 양도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역사를 생각했을 때는 가해자라는 생각에 밉기도 했지만, 일본의 무고한 시민들이 원폭 피해를 받은 사실을 보고 들으니 마음이 복잡했다”며 양가감정을 드러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 앞에서 대전 만년고 학생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동아리를 지도하는 윤현미 교사는 “평화기념관에는 피해만 기록돼 있고 가해의 주체와 원인이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사실은 없었다”며 “아이들이 그런 부분에서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피해와 가해의 역사를 모두 정직하게 직시하려는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들의 사고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며 “구술사인 역사는 책으로 배우는 것보다 실제 보는 게 배움의 깊이가 크다”고 덧붙였다.

 

이날 오전에는 히로시마 국제회의장에서 ‘한국의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의’의 토요나가 케자부로 히로시마지부장의 강연도 들었다. 토요나가 지부장은 한국 정부가 피폭자들에게 충분한 의료 지원을 하지 못하던 시절 일본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등 재한 피폭자 지원 활동을 이어왔다.

 

피폭 당시 아홉 살이었던 토요나가 지부장은 폭심지에서 약 2.5㎞ 떨어진 오나가초에 살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 가기 위해 우연히 폭심지에서 8㎞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폭심지 1.6㎞ 지점에서 건물 철거 작업에 동원됐던 어머니와 세 살배기 남동생은 피폭됐다. 

 

그는 “그 해 8월9일에서야 어머니와 동생을 찾았다. 어머니는 얼굴에 화상을, 세 살 동생은 급성방사능증으로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연이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미국의 사과나 피해에 대한 지원이 있었나요”, “피폭 2세에 대한 의료 지원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한국인 피폭자를 지원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등 학생들의 질문은 꼬리를 물었다. 토요나가 지부장이 “미국의 사과나 지원은 없었지만, 일본인들은 이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답하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

 

민지현 양은 “피폭 현장에서 사람들이 강가의 물을 떠 마시는 사진을 봤다”며 “그 당시 사람들은 방사능의 위험성을 인지한 상태였나”라고 날카롭게 물었다. 토요나가 지부장은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원폭’이란 단어 자체가 금지 용어였고, 방사능의 위험성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 역사문화 교류사업은 미래 세대의 역사 인식과 상호 이해를 높이기 위해 3년 전 시작됐다. 지난해까지는 시·도교육청별 1개 국가와 교류했지만 올해부터는 2개 국가로 확대됐으며, 당초 올해 종료 예정이던 사업도 연장 추진이 검토되고 있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실장은 “각국의 친구를 만드는 것이 미래의 평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학생들의 교류는 국가 간 무분별한 혐오를 줄이는 데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