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제안 걷어찬 헝가리 ‘체스 여제’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요즘 동유럽 헝가리는 이른바 ‘적폐청산’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 4월 총선에서 2010년 이후 16년간 집권한 오르반 빅토르 전 총리의 피데스(Fidesz)당이 참패했다. 새롭게 여당이 된 티서(Tisza)당은 오르반 정권을 ‘부정부패 세력’으로 규정하며 인적 쇄신을 예고했다. 티서당을 이끄는 머저르 페테르 신임 총리는 대통령, 대법원장, 감사원장, 검찰총장 등을 겨냥해 즉각적인 퇴진을 촉구하며 “16년간 오르반 정권을 섬겨 온 괴뢰(꼭두각시)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가 쫓아낼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지난 5월 머저르 총리 취임 후 콜타이 안드라스 언론위원장 겸 국가언론정보통신청(NMHH) 청장이 가장 먼저 파면됐다. 오르반 정권 시절 헝가리 언론 통제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헝가리 출신의 ‘체스 여제’ 폴가르 유디트. 어릴 때부터 ‘체스 신동’ 소리를 들은 그는 12세이던 1988년 체스 올림피아드에 헝가리 여자 대표로 출전해 소련(현 러시아) 선수를 누르고 챔피언이 됐다. 이듬해인 1989년 1월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2014년 8월 정식으로 은퇴할 때까지 25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AFP연합뉴스

지난 20일에는 슈요크 터마시 대통령마저 물러났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헝가리에서 실권은 총리가 갖고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의례적·상징적 역할만 수행한다. 하지만 머저르 총리는 슈요크를 겨냥해 “당신은 헝가리 국가의 통합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고 일갈했다. 슈요크가 자진 사퇴를 거부하자 티서당이 원내 3분의 2 넘는 의석을 장악한 헝가리 의회는 헌법까지 고쳐 가며 슈요크의 임기 단축을 밀어붙였다. 오르반 정권 시절인 2024년 3월 대통령에 오른 슈요크는 원래 2029년 3월까지 재임할 수 있었으나, 머저르 정권의 등쌀을 못 견디고 결국 사임했다.

 

올해 2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에서 ‘체스의 여왕’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체스 선수”라는 평가를 듣는 헝가리 출신 폴가르 유디트(50)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폴가르는 겨우 12세이던 1988년 체스 올림피아드에 헝가리 여자 대표로 출전해 소련(현 러시아) 선수를 누르고 챔피언이 되었다. 이듬해인 1989년 1월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2014년 8월 정식으로 은퇴할 때까지 25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성별 구분 없이 남녀 모두가 참여하는 체스 대회에서도 10위 안에 드는 정상급 실력을 과시했다.

헝가리의 머저르 페테르 신임 총리(왼쪽)와 슈요크 터마시 전 대통령. 머저르 총리는 취임 직후 전임자인 오르반 빅토르 정권 시절인 2024년 취임한 슈요크를 ‘적폐’로 규정하고 임기 만료 전 사퇴할 것을 촉구해 결국 관철했다. AP연합뉴스

머저르 총리는 지난 19일 슈요크의 후임 대통령으로 폴가르를 지명할 뜻을 밝혔다. 헝가리 대통령은 국민 직선이 아니고 의회 의원들의 투표와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뽑힌다. 여당인 티서당이 헝가리 의회를 좌지우지하는 만큼 티서당이 미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확률은 100%나 다름없다. 하지만 폴가르는 20일 머저르 총리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했다. 그는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는 역사적 책임을 맡을 능력이 저에겐 없다고 생각해 대통령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머저르 세력과 오르반 세력으로 갈라져 피 터지게 싸우는 헝가리 정치 현실을 숙고한 결과일 것이다. 슈요크의 말로를 지켜본 폴가르로선 정권 교체 후 자신도 그와 똑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