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임신중지에 해당하는 ‘36주차 낙태’를 시행해 살인 혐의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산모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예정된 가운데 여성 단체들이 산모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앞서 법원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의료 현장에서 생긴 제도적 공백이 문제”라고 했다.
23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에 따르면 여성계와 의료계 시민사회단체로 이루어진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임보넷)’는 지난 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재판장 김용석)에 피고인 권모(26)씨에 대한 살인 혐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권씨는 2024년 6월 임신 34∼36주차로 ‘후기 임신’에 해당하는 상태에서 태아를 출산한 뒤 냉동고에 넣어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1심 재판부는 태아가 모체에서 배출돼 살아있는 사람이 됐기 때문에 낙태죄 위반이 아닌 살인이라고 판단했고, 권씨에 대해서는 낙태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었지만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는 이유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탄원서는 1심 판결이 제도적 공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임보넷은 “권씨가 의료진에게 충분한 의학적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의 고의를 추정하는 것은 책임을 환자에게 전가하는 부당한 판단이고 의료 행위의 본질과 책임 구조를 오해한 것”이라고 했다. 산모 권씨는 병원이 태아를 제왕절개로 출산한 뒤 숨을 멎게 하는 방식으로 낙태할 것이라고 알 수 없었다는 취지다.
임보넷은 산모가 당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렵게 선택한 낙태였던 점도 언급했다. 탄원서에는 “권씨는 사회적·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으며, 가족이나 제도적 지원으로부터 단절된 상황에서 임신을 지속하거나 출산 이후의 삶을 감당할 현실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다. 해당 시술이 이뤄지기 전 여러 차례 시술 거부를 경험한 점도 지적됐다. 단체는 “여러 차례 의료기관 거부와 제도 내에서 안전하고 정당하게 요구할 수 없는 시술의 기회를 어렵게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의료인조차도 먼저 설명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정보에 대해 먼저 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신중지에 대한 현행법의 판단이 공백 상태인 것을 먼저 해결해야지 산모에게 살인의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탄원서에는 “임신중지의 비범죄화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임신 주수에 따른 임신중지 방법, 특히 후기 임신중지에 대한 명확한 의료 가이드라인과 공식적인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며 “국가와 정부 부처가 임신중지 의료서비스에 대한 의료 가이드라인과 시스템을 구축하였다면, 의료인은 그 범위 내에서 설명과 안내를 할 수 있었을 것이고, 환자 역시 해당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권씨가 안전한 의료체계 밖에서 불안정한 경로를 통해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제도적 공백을 만든 국가에 있다는 취지다. 현행법상 임신 24주를 넘는 낙태는 불법이지만,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 국회에서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처벌 규정이 없는 상태다.
앞서 1심 재판부는 “국가가 임신·출산 등에 사회 경제적 조건을 적극 개선하는 데 노력했다면 이 사건은 다른 결과에 이르렀을 것”이라면서 “위기 임산부에 대한 사회 구조적 법적 보호 장치가 아직 부족하다고 보여 이번에 한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임보넷이 제출한 탄원서에는 총 18개 단체와 개인 1542명이 서명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