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은이성지에서 만난 노인이 조부를 호환으로 잃었다고 했을 때 나는 이 토박이 노인을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산지로 둘러싸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다니.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든 고장이므로 백여 년 전에는 첩첩산중 오지였겠으나 그래도 호랑이한테 가족을 잃었다는 증언은 살다가 처음 들어서 믿기지 않았다. 곰곰이 따져보니 조선 말에는 있을 법한 얘기였다. 도적 떼와 함께 호환은 나라에서 골머리를 앓던 사회문제였다지 않은가.
“여보, 백 년 전에 태어났다면 우리가 만났을까?”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 교수
아내가 물어서 “운명, 그런 것 얘기하는 거야?” 하고 나는 반문했다. 아내는 동해 사람이고, 나는 남해 사람이다. 지도에 선을 그으면 250여㎞나 떨어져 태어났다. 호랑이한테 물려 죽지 않고, 징용을 피하거나 전쟁통에 희생되지 않는다면 어부로 살면서 고향 여자를 만났을 게다. 양가의 부모 모두 이웃 동네 사람끼리 만나 결혼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부부가 될 운명이었던 모양이지.”
나는 나름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 고무신을 신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어도 전쟁도 보릿고개도 모르고 자랐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흑백텔레비전을 집에 들인 날 새로운 세계를 만난 듯 환호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었을 때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대학에 입학하자 학교에서는 실습용 원고지를 나누어주었다. 시 소설을 원고지에 쓰거나 타자기로 타이핑해서 제출했다. 군대를 다녀왔더니 386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었다. 원고지에 쓴 소설을 제출했더니 노교수님이 되돌려주며 컴퓨터로 작성해 오라고 했다. 교수님 역시 원고지에 글을 쓰고 있었을 테지만 문학을 시작하는 젊은 친구들은 앞으로 컴퓨터에 적응해야 하리라 예감한 듯했다. 컴퓨터를 가진 학과 동기가 있어서 나는 그의 자취방을 오가며 며칠 동안 소설을 입력했다.
그렇다고 당장 컴퓨터를 장만했던 건 아니다. 워낙 고가여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노트북을 장만한 건 작가가 되고 나서였다. 그렇다고 당장 노트북으로 소설을 쓸 수 없었다. 원고지에다가 초고를 쓰고 노트북에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필기감과 사고력이 연동된 글쓰기 습성을 바로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점차 컴퓨터에 익숙해졌으나 문단의 원로 중에는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평생 원고지를 고집한 분들이 있었다. 문인단체의 실무자로 일하면서 김지하 선생과 김성동 선생으로부터 원고지로 글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인터넷도 그렇다. 나는 홍천이나 천안, 고흥 등지로 옮겨 다니며 작품을 썼다. 잡지사나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려면 플로피 디스크를 포장해 우체국 등기로 보내곤 했다. 천리안이나 하이텔처럼 PC통신이 개통되었을 때는 시내의 PC방까지 가서 원고를 전송했다. 아마 이런 얘기를 들으면 선배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소설가 송영 선생은 동네 공중전화 앞으로 잡지사 기자를 불러내 원고와 고료를 맞교환한 얘기를 생전에 들려주었다. 며칠 굶은 탓에 기자 양반을 기다리며 노포에서 호떡을 집어 먹었는데 과식해서 뒤에는 일어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어쨌든 내 경험치에서 이야기한다면 정보화시대는 숨 가빴다. 용케 적응해 살았으되 호랑이 등에라도 올라탄 듯 멀미가 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타임 루프와 같은 시간여행 서사가 유행이다. 과거인을 현대에 데려다 놓으면 어떻게 될까? 낯선 문명의 이기에, 라이프스타일에 환호하기보다 그들은 모두 신경증에 걸리고 말 것이다. 멀리 중세의 인물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 할머니 세대만 모셔 놓아도 이 세상은 감당되지 않는 세계일 게다.
할머니는 생전에 텔레비전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 상자 속에 난쟁이들이 산다고 여겼다. 드라마의 허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적인 세계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할머니가 불행하였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도 할머니도 웃고 울고 했다.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어쩌면 앞으로 겪을 천지개벽을 할머니처럼 받아들일지 모른다.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할지 시름 깊겠지만 AI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은 갖지 않으려고 한다. 나도 호랑이도 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