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 두 연인은 사랑의 상처를 잊기 위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삭제한다. 개봉 당시만 해도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운다는 설정은 순수한 공상과학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신경과학은 기억을 단순히 저장된 과거가 아니라 수정과 재구성이 가능한 생물학적 과정으로 바라본다. 신경과학자인 저자는 책 ‘기억을 바꾸는 법’에서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다시 쓰이며, 미래에는 부정적 기억을 의도적으로 약화하거나 수정해 치료에 활용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저자 라미레스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원생 시절 수행한 실험이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생쥐의 특정 신경세포 집단을 빛으로 자극해 실제 경험하지 않은 공포 기억, 즉 ‘거짓 기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는 긍정적인 기억을 활성화해 생쥐의 우울·불안을 줄이는 실험도 성공시켰다. 기억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뇌 속에서 조절 가능한 생물학적 현상임을 보여준 이러한 연구는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스티브 라미레스/ 김명주 옮김/ 김영사/ 2만4000원
과거의 기억을 바꾼다는 발상은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기억의 작동 방식 자체가 이미 일종의 ‘변형’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재생하는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다. 어떤 일을 떠올릴 때마다 당시의 경험은 현재의 감정과 상황, 새로운 정보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된다.
이 기제의 핵심에는 ‘엔그램’이라는 개념이 있다. 엔그램은 경험이 뇌에 남긴 물리적 흔적, 다시 말해 기억이 뇌 속에 구현된 물리적 실체를 가리킨다. 우리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모든 경험은 뇌에 측정 가능한 변화를 남기고, 그중 일부가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기억은 컴퓨터 파일처럼 특정 부위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뇌 영역이 연결된 네트워크 형태로 존재한다. 과거에는 기억이 해마에서 대뇌피질로 이동해 저장된다고 여겼지만, 최근 연구는 기억이 처음부터 여러 뇌 영역의 협력을 통해 형성되고 시간이 흐르며 그 네트워크가 계속 재구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최첨단 신경과학을 자신의 삶과 연결해 풀어낸다. MIT 시절 소중한 연구 동료이자 멘토였던 쉬 류의 비극적 죽음이 남긴 상처, 엘살바도르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한 경험, 소수자로 겪은 부당함 등 개인적 기억이 연구 이야기와 함께 전개된다. 개인의 경험과 과학적 탐구가 맞물려 독자는 ‘기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하게 된다.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긍정적 기억이 가진 회복과 치유의 힘이다. 행복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그 감정을 음미하는 것만으로 뇌의 보상회로가 활성화되고 인지적 유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기억을 약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없애는 일을 넘어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 저자는 기억을 통제하는 연구가 앞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불안장애, 중독, 알츠하이머 등 질환 치료의 새로운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