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다. 미 원자력법 123조에 바탕을 둔 이 협정은 사우디의 자체 핵물질 농축·재처리를 잠재적으로 허용, 향후 핵보유 길을 터준 것이어서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 국가들의 연쇄적인 ‘핵 도미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 에너지부는 22일(현지시간) 엑스(X)에 올린 성명에서 “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과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인 압둘아지즈 빈 살만 왕자는 일반적으로 ‘123 협정’으로 알려진 평화적 원자력 협력 협정과 이에 수반되는 양자 안전보장조치 협정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어 에너지부는 “123 협정은 미국 기업들이 사우디의 원자력 에너지 프로그램에 폭넓은 참여를 제공함으로써 미국 사업과 노동자, 공급망에 혜택을 주는 동시에 사우디의 에너지 수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에너지부는 이번 협정이 미국의 원자력 기술 수출 확대, 미국 일자리 창출 및 장기적 경제 성장, 미국의 에너지 및 국가 안보 태세 강화, 글로벌 비확산 기준 보강 등의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1954년 제정된 미국 원자력법 123조는 타국과의 협력 조건을 규정하는 데 근거로 체결된다고 해 ‘123 협정’이라고도 부른다. 한국을 포함해 24개국 정부,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등 51개 정부·기구와 26건의 123 협정이 체결됐다.
123 협정은 핵물질과 관련 장비를 제조하거나 이전 및 저장을 규율한다. 또한 대통령 권한으로 특정 국가에 대한 조건을 면제할 수 있다. 세부적으로 원자력법 123조의 협정 조건은 △이전된 핵물질 및 장비에 대한 IAEA 안전기준 준수 △군사적 목적 및 폭발 장치에 사용 금지 △핵물질을 농축하거나 재처리 시 미국의 사전 동의 필수 △IAEA 안전기준 미준수 시 핵물질 및 장치 반환 등이다.
중동 국가 중에선 아랍에미리트(UAE)가 2009년 처음으로 미국과 123 협정을 맺었다. UAE는 한국의 원전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원전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미국과 123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UAE는 미국의 요구대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플루토늄 생산)와 우라늄 농축을 아예 포기한다는 ‘골드 스탠더드’가 적용됐다.
미국과 사우디와의 협정은 이전과 다른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23조는 미국의 핵비확산·안보 이익에 직접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결정하면 대통령이 일부 조건을 면제해 주는 예외권을 발동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동안 예외권을 발동한 사례는 없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뉴욕타임스(NYT)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미국은 2년간의 공동연구에서 상업적 타당성이 입증된다는 전제 아래, 사우디가 자국에 매장된 우라늄을 채굴하거나 수입해 농축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이 사우디에 원전을 건설하고, 원전 연료를 위한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 연료의 재처리 기술을 이전하되, 농축·재처리에는 미국 인력만 접근을 허용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NYT는 ‘핵물질 농축과 재처리 및 이전은 미국의 사전 승인 없이 불가능하다’는 기존 123 협정의 핵심 조항에 미국 대통령이 면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사우디는 미국과 수년간 걸친 협상 과정에서 UAE에 적용된 골드 스탠더드를 거부해 왔다. 현재까지 보도된 바로는 사우디가 이 같은 입장을 상당 부분 관철한 것으로 보인다.
중동 국가와 국제사회가 사우디의 핵개발 의도를 의심하는 이유다. 앞서 2018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사우디 역시 그 뒤를 따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사우디는 사실상 미국의 승인 속에 핵 잠재력을 확보하게 된 셈이다. 중동의 맹주 지위를 놓고 이란, 튀르키예와 경쟁하는 사우디로선 미국의 ‘인증’을 받았다는 점에서 입지가 탄탄해질 전망이다.
미국도 이번 협정을 통해 경제적·외교적으로 막대한 유·무형의 이익을 얻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은 자국 원전기업인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원자로를 사우디에 독점 공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통한 계약 규모만 수십억 달러에서 수백억 달러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우디의 행보는 주변 중동 국가들을 자극할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튀르키예, 이집트 등도 중동 내 주도권 경쟁에 뛰어든 상황에서 국제 핵 비확산 체제의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 아랍걸프국가연구소의 크리스틴 디완 선임연구원은 “미국 기업들을 부유하게 하고, 사우디를 미국에 더 가깝게 묶는다는 점에서 상업적·지정학적으로 큰 승리”라면서도 “국제 핵 비확산 체제에 가해지는 피해는 상당하다”고 진단했다. 쿠웨이트대의 역사학 조교수인 바데르 알사이프는 이번 협정이 필연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분노를 촉발하고 불확실성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