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 문 연 한미조선협력센터… 미 상무장관 “실제 선박 수로 평가하겠다”

워싱턴에 문 연 한미조선협력센터
미 상무장관, “건조 선박수로 평가,
규제 부딪히면 상무부에 연락하라”
산업장관, “미국과 협력할 준비”
미 의회 협조 없으면 진전 어려워

“회의나 대화는 출발점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미국에서 실제로 선박을 건조하는 것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메이플라워호텔에서 열린 한∙미 조선협력센터(KUSPC) 개소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이 센터를 몇 번의 회의를 열었는지, 몇 건의 MOU를 체결했는지, 얼마나 많은 리셉션을 개최했는지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본이 투자됐는지, 얼마나 많은 시설이 현대화됐는지, 얼마나 많은 근로자가 양성됐는지, 얼마나 견고한 공급망이 구축됐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선박이 실제로 건조됐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언하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워싱턴특파원단

한·미 조선협력센터(KUSPC)는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를 본격화하기 위한 거점이다. 한·미가 지난해 정상회의에서 3500억 달러(약 522조원) 규모 대미 투자 중 1500억 달러(약 224조원)를 조선업에 투입하기로 합의한 가운데, 이 센터는 한국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바탕으로 직접 투자와 기술 교류, 인력 양성 등 협력 프로젝트를 촉진하는 역할을 맡는다.

 

양국 조선협력의 닻을 올리는 자리에서 러트닉 장관이 “실제 조선소에서 선박이 건조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파트너가 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한편으로 “구체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한국을 압박한 셈이다. 다만 실제 한·미 조선협력이 진전되기 위해선 미국 의회의 협조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러트닉 “규제 부딪히면 연락하라”

 

앞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센터 개소가) 미국 조선 사업을 지원하겠다는 한국의 확고한 의지를 상징한다”며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해양 행동계획을 강력히 지지하며,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러트닉 장관은 이어 무대에 올라 실제 선박이 얼마나 건조됐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라며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중시하는 모델이며, 약속이 아니라 생산을 중시하는 모델”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의 해양산업 노동자와 철강 인력을 양성하고, 탄탄한 국내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며 “군함은 물론 상선까지 모든 종류의 선박을 미국에서 건조해야 하며, 적절한 정책을 통해 그러한 선박에 대한 수요를 창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국이 1500억달러를 미국 조선산업에 투자하겠다고 한 약속을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부흥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라며 “미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규제 장벽에 부딪히거나 투자 환경이 충분히 우호적이지 않다고 느끼면 상무부에 연락하라”고도 했다.

 

정인섭 한화오션 사장은 “한화오션은 미국의 조선업 협력과 관련해 진심을 갖고 있다”며 “오랜 계획을 가지고 미국과의 조선업 협력을 한단계씩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발언하는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워싱턴특파원단

이날 양국 정부와 조선업 관련 기업들은 마스가 프로젝트를 가속화하기 위한 15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행사에는 러트닉 장관 뿐만 아니라 윌리엄 키밋 미 상무부 차관과 훙 카우 미 해군장관 대행, 스티븐 카멀 미 해사청장, 앤서니 피셔 미 해사청(MARAD) 비서실장 등 다수의 미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해 미국 측의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한국 기업측에선 정인섭 사장 외에 김형관 HD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 최성안 삼성중공업 대표이사, 유상철 HJ중공업 대표이사 등이 참석했으며 미국 측에서도 조선 기업 제너럴다이내믹스, 선박 수리업체 비고 마린 그룹 등 미 조선산업 공급망에 속한 여러 기업의 관계자들이 초대됐다.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메이플라워호텔에서 열린 한∙미 조선협력센터(KUSPC) 개소식에서 참석자들이 리본을 자르고 있다. 왼쪽 세번째부터 강경화 주미한국대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 워싱턴특파원단

양국 의원들도 참석했다. 미국 의회에서는 토드 영(공화·인디애나)·마크 켈리(민주·애리조나) 상원의원이 참석했고, 한국에서는 방미중인 한·미의원연맹 소속 신정훈·차지호(더불어민주당), 배준영·조정훈(국민의힘) 의원이 자리를 지켰다. 특히 영 의원은 자신이 추진하는 ‘미국을 위한 선박법(Ships for America Act)’을 거론하며 “미국 혼자서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국적 국제운항 상선을 10년간 최대 250척 늘리고 세제·금융 지원을 확대하는 내용의 ‘미국을 위한 선박법’은 상·하원에 각각 발의됐지만 아직 위원회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날 행사장엔 ‘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문구와 한미 국기가 수놓아진 빨간색 모자가 기념품으로 각 자리에 깔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모자’를 흉내낸 것이다. 홍주형 특파원

◆법적 제약 등 과제 산적

 

러트닉 장관이 이날 규제 장벽에 부딪히면 언제든 상무부에 연락하라고 했지만, 한·미 조선협력이 맞닥뜨린 핵심 장애물 가운데 상당수는 상무부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 군함과 주요 선체 구조물의 해외 건조를 제한하는 톨레프슨-번스 수정안(Tollefson-Byrnes Amendment)과 관련 연방법 조항이다. 미국 현지 조선소를 확보하더라도 공급망과 숙련인력이 충분히 갖춰지기 전에는 초기 선박이나 선체 블록의 일부를 한국에서 제작하는 혼합 방식이 현실적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미 의회 내에서는 자국 조선업 보호를 이유로 신중론이 여전하다.

 

23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 한미경제연구소(KEI)에서 열린 스팀슨센터·KEI 공동주최 ‘한·미 조선협력의 향후 과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한·미 조선협력의 과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KEI 유튜브 캡처

이날 오후 스팀슨센터와 한미경제연구소(KEI)가 공동 주최한 ‘한·미 조선협력의 향후 과제’ 토론회에서 론 오루크 미 의회조사국(CRS) 해군 분야 분석관은 이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의회의 분위기가 분명 달라졌다”며 “적어도 외국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방안이 현실적인 선택지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과거보다 외국 조선소를 활용한 군함 또는 주요 선체 구조물 생산 가능성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오루크 분석관은 미군 함정의 해외 건조를 제한하는 연방법 10편 8679조와 해안경비대 함정에 적용되는 연방법 14편 1151조에는 국가안보상 필요에 따라 대통령이 예외를 승인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도 설명했다.

 

다만 그는 매년 국방세출법의 해군 조선예산에 포함되는 별도의 조항은 군함이나 주요 선체 구조물을 해외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데 해당 예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면서도 대통령 면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영구법상의 예외 권한을 행사하더라도 의회가 예산법의 제한을 유지하면 실제 사업 추진에 제약이 생길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한·미 조선협력의 확대를 위해서는 의회의 협조가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이 밖에도 미국 내 공급망 구축과 숙련인력 확보, 양국 산업문화의 차이 등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거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