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현 일왕과 36∼38촌 떨어진 옛 왕족 남성을 왕실의 양자로 들이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성인 입양’ 문화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수백년 동안 이어온 가업과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아왔다. 과거 사무라이 계층의 후계자 선정부터 대기업 경영권 승계, 최근 ‘황실전범’ 개정 논의까지 일본 사회 곳곳에는 이 같은 문화가 깊게 스며 있다.
◆ 일본의 오랜 관습 ‘성인 입양’
일본 참의원은 황실 운영 전반을 규정한 ‘황실전범’ 개정안을 지난 17일 가결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여성 왕족이 일반인과 결혼한 뒤에도 왕족 신분을 유지하도록 하고 옛 왕가의 남계 남성 후손을 왕실 양자로 들여 그 아들에게 왕위 계승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이자 직계 왕족인 아이코 공주는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고 현 일왕과 36∼38촌 관계인 남성이 양자로 입적할 가능성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성인을 양자로 삼는 관습이 이어져 왔다. 2021년 10월 한 달간 일본 법무성에 접수된 ‘보통입양’ 신고 사례 1601건 가운데 성인 입양은 47.5%(760건)로 미성년 입양(52.5%·841건)과 비등한 수준을 보였다. 조사 당시 일본은 만 20세 이상을 성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전체 입양자의 평균 연령은 23.57세, 최고령은 85세로 집계됐다. ‘보통입양’은 일본의 입양 제도 가운데 하나로 성인도 양자로 맞을 수 있는 방식이다.
이는 가문이나 가업을 잇기 위해 성인 양자를 맞아들이던 일본 문화에서 비롯됐다. 일본 경제학 박사 모리구치 치아키는 2012년 일본 이치바시 대학 홍보지에서 “일본에서 혈족이 아닌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타아 입양’은 1%에 불과하다”며 “일본은 가문이나 가업의 승계를 목적으로 하는 입양이 압도적으로 많은 ‘성인양자대국’”이라고 설명했다.
◆ 일본 역사 속 성인 양자 문화
일본에서 성인 입양 관습이 본격적으로 확산한 시기는 에도시대(1603∼1868년)다. 당시 사무라이 계급에서는 성인 남성을 차기 당주에 앉히기 위해 양자로 입적시켰다. 특히 적자가 없거나 아들이 있더라도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가문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보존하고자 성인 입양을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며 사위를 양자로 들이는 ‘무코요시(婿養子·서양자)’ 제도도 등장했다. 처가살이한다는 점은 같아도 일반적인 ‘데릴사위’와는 차이가 있다. 무코요시는 처가의 성씨를 사용하고 재산과 가업 등을 상속한다. 이외에도 당주인 형이 동생을 양자로 삼는 ‘순양자(順養子)’ 제도도 존재했다.
◆ 일본 기업을 이끄는 양자들
이 같은 전통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노포나 현대 일본 기업에서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 스즈키는 2∼4대 사장이 모두 사위를 양자로 입적하는 무코요시를 통해 가업을 승계한 사례다. 스즈키 슌조는 창업주 스즈키 미치오의 장녀와 결혼해 2대 사장에 올랐다. 3대 사장인 스즈키 지쓰지로도 창업주의 셋째 딸과 혼인해 경영을 맡았다. 4대 사장인 스즈키 오사무 역시 창업주의 손녀이자 2대 사장의 딸을 배우자로 맞아 가업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모두 혼인과 함께 처가의 성인 ‘스즈키’를 따랐으며 현재는 4대 사장의 장남인 스즈키 도시히로가 기업을 이끌고 있다.
이 밖에도 글로벌 게임 기업 닌텐도를 비롯해 자동차 회사 도요타, 금융사 마쓰이 증권, 간장이 유명한 식품 제조업체 깃코만 등이 사위를 후계자로 맞은 바 있다. ‘자식은 선택할 수 없지만, 사위는 선택할 수 있다’는 현대 일본 기업에서도 통하는 표현이다.
다만 일본 기업들의 성인 입양과 이번 ‘황실전범’ 개정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기업에서는 양자 본인에게 경영 승권과 권한이 주어지나 일본 왕실 개정안에서는 그 아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일반 성인 양자 중에는 혈족이 아닌 사례도 흔한 반면 일본 왕실은 36∼38촌에 달하는 먼 친족일지라도 ‘옛 왕족의 남계 남성 후손’ 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