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느리 음악에 기무간의 춤, 김율희의 판소리가 어우러지는 굿판 ‘무감서기’가 9월에 관객을 만난다. 미래가 기대되는 청년 예술가들이 만들어낼 에너지가 기대되는 무대다.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무용단 신작 ‘무감서기’를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초연한다. 윤혜정 서울시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이 안무를 맡아 서울굿에 담긴 정화와 치유의 의미를 현대적 의례로 풀어낸다.
서울굿은 화려한 무복과 삼현육각 반주에 춤과 노래를 곁들여 산 사람의 복과 안녕을 빌거나 망자의 천도를 기원하는 서울 지역의 무속 의례다. 서울시무용단은 그중 굿판의 흥과 에너지가 최고조에 이르는 ‘무감서기’에 주목했다. 굿을 의뢰한 사람이 막바지에 무녀의 옷을 입고 장단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추는 행위다. 무녀가 대신 복을 빌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굿의 주인이 직접 춤판에 들어가 복을 맞아들이는 절차다. 서울시무용단은 여기에 ‘복을 스스로 빈다’는 의미를 더했다. 누군가 내려주는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인간이 자신의 상처와 불안을 마주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을 그린다.
작품은 흑·황·청·적·백 등 오방색을 상징하는 다섯 색의 눈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각각의 눈물은 몸에 남은 기억과 감정의 서로 다른 단계를 나타낸다. 흑의 눈물은 고통이 몸에 깊이 새겨진 상태다. 황의 눈물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고통을 알아차린다. 청의 눈물은 기억과 몸을 분리해 바라보며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적의 눈물에서는 억눌렸던 감정과 기억이 한꺼번에 분출된다. 모든 감정을 통과한 뒤 만나는 백의 눈물은 기억을 품은 채 삶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상징한다.
공연은 이 같은 치유의 여정을 다섯 장과 12개의 굿거리로 구성한다. 무녀의 독무와 군무로 맺힌 감정을 씻어내며 시작한다. 이어 방울 소리와 함께 신을 청하고 혼탁한 기운을 걷어내는 의례가 펼쳐진다. 다음으로 복을 기원하는 비나리와 감정의 분출을 거쳐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살풀이로 나아간다.
‘백의 눈물’에서는 모든 감정을 통과한 남성 무용수가 컨템퍼러리 살풀이를 펼친다. 한과 슬픔을 완전히 떨쳐내기보다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평온과 정화의 경지를 몸으로 형상화한다.
작품의 절정은 제목과 같은 무감서기다. 무용수 45명이 오방색의 에너지를 품고 무대를 가득 채운다. 흩어져 있던 몸짓은 점차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합쳐지고 각자의 치유는 공동체의 울림으로 확장된다. 대규모 군무와 라이브 음악이 결합해 굿판 특유의 생동감과 해방의 에너지를 대극장 무대로 옮긴다.
음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에 재학 중인 이하느리가 맡는다. 헝가리 버르토크 월드 작곡 콩쿠르와 중앙음악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젊은 작곡가다. 국악과 현대음악은 물론 영화와 공연음악을 넘나들며 활동해온 그가 무용 공연 음악을 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하느리는 서울굿의 장단과 방울 등 무구에서 나는 소리를 재료로 새로운 굿 음악을 만든다. 전통 장단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장면의 전환과 인물의 감정 변화에 맞춰 현대적으로 변주한다. 라이브 연주와 소리가 무용수의 움직임에 호흡을 불어넣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곡도 선보일 예정이다.
엠넷 ‘스테이지 파이터’로 이름을 알린 기무간은 조안무와 출연을 겸한다. 작품 초반부를 이끄는 ‘흑의 눈물’과 ‘청의 눈물’ 안무를 함께 설계하고 ‘백의 눈물’ 무대에 직접 오른다. 한국무용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기무간의 움직임이 서울시무용단의 군무와 어떤 대비를 이룰지도 관전 요소다.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인 김율희는 ‘백의 눈물’ 무대에 참여한다. 김율희의 소리는 춤의 배경에 머무는 반주가 아니라 굿의 호흡과 정서를 이끄는 또 하나의 무대 언어로 활용된다. 무용과 음악 사이를 오가며 의례의 생동감을 더한다.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과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연출한 장철수 감독은 미디어아트를 맡는다. 영화적 미장센과 편집 감각을 무대에 적용해 현실과 의례, 기억과 감정이 교차하는 시각적 공간을 만든다. 대본은 이단비가 쓰고 김종석이 무대디자인을 맡는다. 민천홍의 의상과 김정화의 조명도 오방색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치유의 서사를 뒷받침한다.
윤 단장은 “누군가 나를 대신 구원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며 “내 눈물은 결국 내가 닦아야 한다. 관객들이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