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임대, 생애주기 연계로 ‘주거 사다리’ 역할 해야” [심층기획-공공주택 공급 지연, 속타는 무주택자]

취업·결혼·출산 등 변화 반영 못해
서울 2027년부터 무더기 계약 만료
정부, 뒤늦게 입주 기준 개편 나서

“월급이 조금 올랐을 뿐인데 집을 비워 줘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행복주택에 거주 중인 직장인 김모(31)씨는 최근 재계약을 준비하면서 자산 기준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이직 후 월급이 오르고 저축이 늘면서 자격 유지가 가능할지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27일 “민간 전·월세 주택으로 당장 옮길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재계약 심사 때 자산 기준을 넘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건설현장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기사와는 직접 관련 없음. 뉴스1

김씨의 고민은 공공임대가 입주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며 취업과 결혼, 출산 등으로 주거 여건은 달라지지만, 현행 공공임대 정책은 입주 이후 생애주기 변화에 맞는 주거 이동과 지원 체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가 무주택자의 주거 안정을 위해 2007년 5월 처음 도입한 장기전세주택(시프트)만 해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 장기전세주택은 주변 전세 시세의 80% 이하 보증금을 내면 2년마다 계약 갱신과 최장 20년간 거주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장기간 안정적으로 거주하면서 모은 돈으로 내집을 마련해 나가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기대했던 제도다. 하지만 서울 송파구 송파파인타운과 강동구 강일리버파크, 고덕리엔파크 등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임대계약이 만료되는 장기전세주택 단지의 입주민 사이에서는 “갈 곳이 없다”며 계약 연장이나 분양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른다.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공사)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내년 310가구를 시작으로 △2028년 682가구 △2029년 1747가구 △2030년 2452가구 △2031년 4170가구의 장기전세계약이 끝난다.

입주자들의 요구가 수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입주 시 작성한 계약서에 조건이 명시된 데다 기존 입주자에게 추가로 연장해 줄 경우 신혼부부와 청년 등 새 입주 대기자와 형평성 문제는 물론 또 다른 논란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SH주거안심종합센터 등이 다른 공공임대 지원제도를 안내하는 등 부작용 최소화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광훈 공공임대주택 장기전세위원장은 “예전에는 장기전세에 살면서 집을 마련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집값이 크게 올라 계약이 끝나도 갈 곳이 없다”며 “공공임대를 개별 제도로 운영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생애주기에 맞춰 다음 주거로 이어지는 주거 사다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LH 토지주택연구원도 2023년 ‘공공임대주택 거주 실태조사’ 최종보고서에서 가족 구성과 생애주기 변화에 맞춰 다른 유형의 공공임대로 이동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정부는 뒤늦게 입주 기준 개편에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공공임대 지원 체계 개편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취업과 결혼, 출산, 고령화 등 생애주기별 소득·자산 형성 특성을 반영해 공공임대 입주 기준을 개선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연구용역은 올해 4분기 완료될 예정이며, 결과를 토대로 제도 개선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남진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자녀가 태어나거나 노년기에 접어드는 등 생애주기에 맞춰 주거를 옮길 수 있도록 이동의 다양성을 넓혀야 한다”며 “공공주택도 다양한 삶의 방식에 맞춰 공급하고, 소득 증가만을 기준으로 지원이 단절되기보다 주거 안정을 이어갈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