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브이로그’, 선비의 북경 핫플 탐방기 [조선생활실록(實LOG) ⑳]

300년 전 선비의 ‘북경 브이로그’
연행록 탐독하며 여행 준비 철저
선배가 개척한 핫플을 답사하고
마두는 베테랑 현지 가이드 역할
굳게 닫힌 문도 청심환 주면 열려
오늘의 여행 콘텐츠와 꼭 닮은꼴

해외여행을 앞두고 우리는 유튜브를 켠다. 영상을 보며 핫플을 점찍고, 맛집을 저장하고, 현지 투어를 예약한다. 돌아오는 가방에는 선물과 기념품이 가득하다. 이 익숙한 풍경을 300년 전 조선 선비들도 북경에서 비슷하게 연출했다.

 

1624년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 일행의 행로를 그린 그림 가운데 북경 부분.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도착한 지식인은 북경 곳곳을 탐방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다른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공식 통로는 외교 사절단, 곧 사행이었다. 명목은 엄연한 공무 출장. 그러나 두 달여를 이동해 북경에 도착한 조선 지식인들은 틈틈이 낯선 도시를 구석구석 탐방하고 새로운 문물을 기록했다.

 

여행 준비도 지금과 닮았다. 그들은 먼저 중국에 다녀온 선배들의 연행록을 탐독했다. 18세기 김창업의 『연행일기』,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요즘으로 치면 조회수가 터진 여행 브이로그였다. 소매에 쏙 들어가는 포켓북 형태의 안내서와 북경 지도도 미리 챙겼다.

 

19세기 사신 김경선이 자신의 연행록에 그려 넣은 북경 지도. 자금성과 북경 성문 위치를 한눈에 담은 ‘조선판 구글맵’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784년 강세황 일행이 자금성 서쪽의 태액지에서 열린 ‘빙희연’을 관람하고 남긴 그림. 황실 연회는 공식 외교 일정인 동시에 조선 선비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볼거리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보력이 여행의 질을 좌우했다. 아는 만큼 더 멀리 갔고, 본 만큼 기록도 풍성해졌다. 1712년 북경으로 떠나던 김창업은 지인에게서 “오룡정이나 천주당은 우리나라 사람이 가기 어려운 곳인데 나는 봤다”는 자랑을 들었다. ‘카더라’ 입소문을 접수한 채 북경에 도착한 김창업은 역관이 구해다 준 현지 지리지를 읽고 “이 책을 얻으니 더욱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며 들떴다.

 

북경 동쪽 지역에 특화한 이 책을 펼쳐 들고서 그는 조선 사람이 가 본 적 없던 북경 외성 동남쪽의 약왕묘와 금어지, 법장사까지 행인에게 길을 물어 찾아갔다. 8년 뒤인 1720년 이기지는 반대편 지역의 지리지를 함께 참고하여 북경 외성 서쪽의 천녕사와 백운관, 보국사를 탐방했다. 두 사람이 찾아낸 명소들은 후배 사신들이 반드시 들르는 핫플이 되었다.

 

오늘날 이화원이 자리한 북경 서북쪽 교외의 명승 서산 일대를 그린 그림. 카메라가 없던 시대에 붓으로 남긴 ‘인증샷’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절단에는 베테랑 가이드도 있었다. 마두(馬頭)라 불린 하급 수행원들이다. 수십 차례 중국을 오간 마두들은 북경 지리와 중국어, 현지 인맥에 밝은 ‘중국통’이었다. 1766년 1월 홍대용이 서산을 두루 돌아보고 천주당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세팔이라는 이름의 노련한 마두가 주선한 덕분이었다. 세팔은 5년 전 사행에서 이의봉을 안내했던 바로 그 가이드였다. 앞선 여행에서 개척한 길과 가이드 노하우는 다음 여행자에게 이어졌다. 오늘날 알찬 여행 콘텐츠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듯, 남다른 동선과 풍성한 견문을 담은 연행록은 후대에 거듭 읽히며 새로운 사행의 길잡이가 되었다.

 

관광지의 닫힌 문을 여는 입장권은 청심환이었다. 조선 청심환은 북경 가게에서 ‘고려청심환’ 간판을 내걸 만큼 인기 있는 명품이었다. 황실 원림이나 천주당 같은 곳의 문지기들은 조선 사람만 보면 대놓고 청심환을 요구했고, 몇 알 쥐여 주면 굳게 닫힌 문이 스르르 열리곤 했다. 오죽 인기였으면 가짜 청심환까지 나돌았다.

 

쇼핑도 빠질 수 없었다. 서점과 골동품 가게가 이어진 유리창 거리에서 홍대용은 페르시아 시장에 들어온 듯 황홀하여 종일 다니고도 물건 하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1760년 사신 서명신의 짐 속에는 지인들이 부탁한 물건이 가득했다. 누구는 문집, 판서 댁은 약재, 참판 댁 숙모는 안경, 또 누구는 주홍색 먹과 향기로운 차를 부탁했다. 공무 출장길에 지인들의 해외 구매 대행까지 맡은 셈이다.

 

1828년 종사관 김지수 일행이 청나라에 사행을 다녀온 내용을 담은 가사인 《서행록》을 필사한 책.

시대마다 뜨는 핫플도 달랐다. 원명원과 서산 일대의 황실 원림은 오랫동안 외국 사신의 출입이 제한된 구역이었지만, 1780년대 조선 사신의 공식 연회 참석이 확대되면서 금단의 정원이 새로운 관광 코스로 떠올랐다. 19세기에는 북경 문사들의 아지트였던 법원사, 장춘사, 도연정, 만류당, 석조사 등이 주목받았고, 노구교 같은 교외 명승까지 여행 반경이 넓어졌다. 현지 친구를 따라가야 알 수 있는 ‘찐 로컬 핫플’도 생겨난 것이다. 18~19세기 북경에서도 핫플 지도는 쉬지 않고 업데이트되었다.

 

관광지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똑같았다. 북경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전망 좋기로 소문난 법장사 7층 탑. 김창업이 이 탑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온 뒤로, 후배 사신들은 탑에 올라 선배와 지인들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그 곁에 제 이름을 보태고 내려왔다. 유명인이 다녀간 자리가 성지순례 코스가 되고, 벽면에 ‘누구 왔다 감’이 쌓여 가는 오늘의 풍경 그대로다. 말하자면 여러 세대가 이어 쓴 여행 방명록이었다.

 

귀국한 사신에게 임금이 물었다. 북경의 명소들을 가 보았는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면이다. 조선의 왕마저 북경 여행 후기가 궁금했던 것이다. 카메라와 영상 플랫폼은 없었지만, 낯선 세계를 보고 기록하고 공유하려는 마음은 300년 전 조선 선비들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20)

 

임영길 성균관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