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모두 돌아가셨으니 이제 죽음의 순번이 나에게 왔구나. 십년 전 홀로 남은 어머니마저 작고하자, 장녀인 그는 자신이 마침내 죽음의 순번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가 아닌, 당사자로서 죽음이나 소멸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사실 그는 이미 그 몇 해 전에 60대 여성 세대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려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자꾸 우울하고 어둡고 무력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죽음이란 자신의 삶이 아닌 어머니의 삶으로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과연 어떻게 소멸되어 갈까. 소설가 은희경은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몸을 갖고 살아가기에 몸을 통해 인생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어떻게 나아가고 상처가 되며, 또 어떻게 회복이 되고, 결국 그 사람이 되는지를. 이렇게 생각하자 소멸이나 죽음을 맞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더 들어왔다.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장편소설 작업에 매달렸다.
잡지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부터 이듬해 가을호까지 연재를 한 뒤 숙고의 시간을 거쳐 다듬어 펴낸 작품으로, “발견과 성장의 여정”이라는 공통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첫 장편 ‘새의 선물’과 ‘빛의 과거’를 잇는 ‘시간 3부작’이라 부를 수 있겠다.
각각 이른 1월생과 12월생인 언니 안나와 동생 경선은 자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성격도 외모도 제각각으로 서로에게 무심한 채 예순다섯이라는 나이를 맞는다.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만나지 않는 자매는 경선의 신장에서 종양이 발견되면서 뜻밖에 병원에서 조우하게 된다.
안나는 예정에 없던 경선의 보호자가 되고 동시에 경선의 손자 다니엘까지 돌보게 되면서, 두 자매는 잊고 지내던 과거를 하나둘 떠올리며 서로를 깊이 알아가게 된다. 경선의 출생과 백일 사진 촬영 날, 안나가 오래전 안나푸르나에 여행을 갔을 때 만나게 된 남자와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경선이 죽은 전 남편 P와 결혼하게 되기까지 과정과 이후 결혼 생활….
안나와 경선, 경선의 손녀 다니엘은 온천과 항구도시로 알려진 이국으로 근거리 해외여행을 떠나고, 이곳에서 ‘우리의 첫’ 게임을 같이 하게 된다. 세 사람은 ‘나의 첫사랑’, ‘나의 첫 선생님’ 등 과거의 내밀한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행지에서 돌아온 안나와 경선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서로의 기억들을 마침내 소용돌이처럼 펼쳐보이게 되는데.
“한 사람의 몸 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거처할 최후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재로 사라진다. 개체의 시간을 끝내고 무한에 섞여 드는 여정이다.”
소설은 현재형 시제로 쓰여 동시대적 시간 감각 속에, 타인의 살갗과 내면 모두를 감각하게 하는 섬세한 장면의 디테일, 삶과 죽음의 사유로써 잔잔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그리하여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닿는 독자라면 지리멸렬한 삶이 얼마나 빛나는 우연과 운명으로 이뤄져 있는지 깨닫게 될지도.
첫 장편 ‘새의 선물’로 누적 발행 100쇄를 돌파하고 여덟 편의 장편소설과 일곱 권의 소설집을 펴낸 중견 작가 은희경은 왜 몸이라는 프리즘으로 우리네 삶과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 것일까. 그가 타협하지 않고 사유한 몸에 새겨진 시간과 인생의 감촉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은 작가를 지난 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쓰는 과정에선 어떤 ‘불안한 순간’들이 오기도 하는데요, 이번에는 어땠나요.
“어떻게 보면 다른 소설보다 쓰는 게 힘들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냥 제 세대의 이야기이고, 제 기억이고, 그런 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특히, 여행 장면은 제가 느꼈던 것이고, 여행지를 다시 가서 디테일을 더 구성하는 등 방법이 보이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사실은 인물의 캐릭터를 설득시키기가 어려웠어요. 안나는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자기 세계 안에 사는 등 겉으로 보면 되게 차가워야 되잖아요. 세상을 싫어해야 될 것 같은데, 굉장한 휴머니스트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혼자 인사도 던지고, 추워하는 사람이 빨리 좀 신호가 바뀌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등 좀 따뜻한 사람이거든요. 조금 모순된 인물을 설득해야 되니까 어려웠는데, 왜 그랬냐 하면 저는 그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복잡하잖아요. 경선도 환대받으며 태어났고 사랑받고 자라서 어떤 허영심이 있는 인물일 것 같은데, 의외로 마음이 순수하고 인간의 사랑을 믿는단 말이죠. 결혼할 땐 세속적인 것과 거리가 먼 선택을 하고, 그 남자의 순수함을 믿죠. 이렇게 모순적인 인물을 설득해야 되는 게 좀 어려웠지만, 저는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그런 모순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결국 독자들도 이 인물들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흔적을 남기거나 미래를 감지하는 프리즘이 왜 하필 몸이었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죽음이라는 것이 몸으로 증명되는 것이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어요. 아무리 정신이 멋을 부려도 몸이 끝나버리면 멋 부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지요. 정신의 소멸 등에 대해선 많이 이야기했는데, 저는 몸에 집중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몸에 새겨진 이야기도 있고, 몸이 늙고 죽으면 사람은 죽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몸을 중심으로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시간은 몸에 가장 확실하게 새겨지는 거니까요. 아무도 피할 수 없고, 정신은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몸이라는 게 시간인데, 누구에게나 닥쳐오니까요.(혹시 특별히 시간에 따른 몸의 변화를 느끼는 부분이 있나요) 소설에 다 썼어요. 좀 낫게 해 달라고 병원에 가면 다 노화라고 그러지요(웃음).”
1959년 고창에서 나고 자란 은희경은 중편소설 ‘이중주’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이 같은 해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에 각각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빛의 과거’ 등을,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중국식 룰렛’ 등을 발표했다. 동서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한 뒤에야 은희경은 조금 여유 있게 소설을 쓸 수 있게 됐다. 보통 오전 6시쯤 일어나 30분쯤 집에서 요가 등 운동을 한 뒤 일찍 여는 카페에 간다. 3시간 정도 글을 쓴 뒤 집으로 돌아와 오후에는 이메일도 확인하거나 책을 보거나 사람들을 만난다. 쉬기도 하고. 마감이 다가오면 오후에 한 텀 더 글을 쓴다. 마감이 임박하면 글쓰기를 세 텀으로 늘리고. 취미는 퍼즐이나 스도쿠 게임. 밤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책 속의 어느 장면이나 문장을 읽다가, 또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은희경은 문득 소설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뜻한 안나도, 죽은 전 남편 P의 말을 되돌려준 동생 경선도….
“우리 모두는 고통을 겪고 또 해결하면서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변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은 어딘가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 내가 생각한 진실과 사랑이 그런 방식으로 지켜져서 훗날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그걸 믿는다면 죽음 또한 소멸이 아닌 시간의 재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