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한국과 미국의 부정선거론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에
美 법원·정부·언론이 제동
韓은 선관위 부실 관리 탓
선거 불신… 신뢰 되찾아야

미국 동부시간으로 지난 1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연설이 선거와 관련된 것이라고 예고했다. 백악관은 “연설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약 25분간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미국 유권자 파일 2억2000만건을 매수 또는 해킹으로 확보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했고, 미국 정·재계·언론계의 ‘딥스테이트’(실세)가 중국의 대선 개입 정보를 은폐·축소했다고 했다.

이진경 국제부장

사실 2020년 재선 도전이 실패로 끝난 뒤 트럼프 대통령은 “대규모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우편투표 조작과 투·개표기 오류 등을 주장하며 수십건의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과 선거 당국은 결과를 뒤집을 만한 부정선거의 증거는 없다고 판단했지만 꿋꿋하다.



이에 대한 미국 사회 반응은 싸늘하다. 부정선거를 믿는 일부 지지자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야당 민주당뿐 아니라 여당 공화당에서도 투표 결과 조작설에 동조하지 않는 의견이 적지 않다. 지난 16일에도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에 나섰지만 CNN과 ABC, NBC 등 주요 방송사들은 이를 생중계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주장을 전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선거론을 보고 있자면, 한국의 현실도 눈에 들어온다. 미국에서는 일부 정치인의 거짓 주장을 법원과 선거 당국, 언론이 견제하며 제동을 걸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선거를 관리해야 할 헌법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가 스스로 부정선거론이 파고들 틈을 만들었다. 40년 넘게 백악관을 출입해온 미국의 고참 언론인 재키 칼메스가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선거 주장을 비판한 칼럼의 제목 ‘트럼프는 선거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를 훔치고 있다’를 인용하자면 ‘헌법기관이 선거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를 훔친 것’과 다름없다.

지난달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일부 유권자들의 장시간 대기하고, 일부는 투표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원인은 예상 투표 수요에 못 미친 수준으로 투표용지를 준비했기 때문으로 파악됐다. 투표용지 제작 예산은 증액해 받아 놓고는 더 적게 찍었다고 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 진상 규명을 위한 검경 합동수사본부 수사가 진행되면서는 투표율 임의 작성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실무자들이 투표자 수를 잘못 입력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다른 투표소 투표자 수를 수정했다는 것이다. 투표 당일 최종 투표자 수와 투표율만 맞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투표용지 부족, 투표자 수 임의 수정이 곧 조작선거 또는 부정선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선거론은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선관위의 지방선거 부실 관리가 부정선거론을 키웠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일반 시민들에게도 “혹시”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이른바 ‘올공(올림픽공원) 시위’는 5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선거 제도를 지켜야 할 일부 정치인들은 불신을 더 부추기고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민의의 반영이고,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선거가 공정했다는 사회적 합의는 승자에 정당성을 준다. 그래서 선거가 흔들리면 민주주의가 흔들린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네 가지 신호 중 첫 번째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민주주의 규칙 거부를 꼽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관리에 잘못이 있었을 뿐 아직 한국의 선거는 공정하다고 믿고 싶다. 이미 벌어진 선거 부실 관리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내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책을 만들고 실천하길 바란다. 믿음이 흔들린 지금, 또다시 선거 관리에 빈틈이 생긴다면 지금보다 더한 혼란이 빚어질 우려가 크다. ‘선거는 공정하고, 과정도 공정하다’는 명제가 다시 당연해지도록 모두의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