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언론사에 입사해 6개월의 수습 기간을 마친 뒤 처음 배정받은 출입처가 국회였다. 당시 언론에선 한나라당을 두고 ‘한 지붕 두 가족’, 친박(친박근혜)계는 ‘여당 속 야당’이라 불렀다. 정권 창출을 이끈 친이(친이명박)계가 18대 총선 공천권을 쥐고 친박(친박근혜)계 중진 의원들을 대거 컷오프한 이른바 ‘공천 학살’의 여파로 양측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식당에서 상대 계파의 정치인을 만나면 그대로 발길을 돌려 다른 식당으로 옮길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었다. 일부 보좌진들은 점심 약속을 잡을 때 미리 식당에 연락해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기도 했다.
두 계파 간 살벌한 신경전이 악재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기업가, 교수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됐던 친이계는 실용·성과주의 행정을 표방했고, 친박 인사들은 정통 보수 정당의 계보를 근간으로 삼고 원칙과 신뢰를 중시했다. 각종 정책과 국정 운영 방향을 두고 양측이 치열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비즈니스적 결합체라는 비판 속에서도 유연성과 효율을 추구했고, 다른 한쪽은 변화에 둔했지만 강한 결속력으로 명분을 지켰다. 출발부터 너무 달랐던 두 계파가 경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상호 보완작용을 일으켰고, 이는 당의 외연을 확장하는 효과로 이어졌다.
2010년 6월29일 ‘세종시 수정안’의 국회 본회의 부결은 계파전의 중대한 변곡점이 됐다. 이명박정부가 행정수도 이전 대신 세종시를 교육·과학도시로 탈바꿈하는 구상을 내놨지만, 당시 박근혜 전 대표가 직접 반대 토론까지 나서 본회의 통과를 막았다. 여당이 낸 법안을 여당 스스로 좌초시키며 정부 국정 운영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란 분석이 나왔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는 국회 결정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양측이 더 이상 확전을 자제하면서 이듬해 큰 잡음 없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고, 기존 지지층에 정치적 요충지 충청권 민심까지 더해지며 정권 재창출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