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녹음 스튜디오. 성우 지망생 수빈(가명·20)이 한 손에 태블릿 PC를 들고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섰다.
“침묵의 장기라 불리는 간은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장기로, 횡격막 아래에 위치합니다.” 한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우 박준모(33)씨가 손을 들었다. “‘가장 큰 장기로’ 할 때 ‘큰’ 자가 살짝 튀죠.” 수빈이 다시 읽었다. 박씨가 다시 손을 들었다. “‘성인 기준 무게는’ 하면서 통통통 튀는 느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수빈의 목소리는 조금씩 안정된 톤으로 바뀌었다. 녹음이 진행되던 중 이번에는 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해도 될까요?” 박씨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스스로 깨닫다니, 너무 좋아요.”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한 것은 이날로 다섯 번째다. 수업료는 따로 받지 않는다.
“홀린 듯이 눌렀어요. ‘안타까운 사연이구나’ 하면서 쭉 읽어 내려가는데, 꿈이 성우라는 거예요.”
기사는 수빈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수빈은 반지하 방에서 초등학생 동생 둘을 돌보고 있었다. 아빠는 8년 전 집을 나갔고, 엄마는 두 차례 아동·청소년 방임으로 처벌받은 이후 이제는 아예 따로 산다. 수빈은 대학에 가지 않았고, 일주일에 한 번 성우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월 30만원인 학원비는 주말 웨딩홀 뷔페 아르바이트로 충당했다.
박씨는 그날 바로 취재팀에 메일을 보냈다. 수빈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현실의 벽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학생의 사연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금전적인 도움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답을 찾았다. 박씨는 수빈 외에도 9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수빈에게 멘토가 되기로 했다.
KBS 공채 48기 출신인 그는 수빈이 목소리가 안 나와서 KBS 성우 공개채용에 지원하지 않았다는 대목에 “남에게 말 못할 무언가가 있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로 뭉뚱그려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성우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은 박씨가 누구보다 잘 안다. 본격적인 준비부터 성우에 합격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는 ‘잘하는 것 같은데 왜 떨어지지’라는 생각이 반복될 즈음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편도선 제거와 비염 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다 4년간 발성을 제대로 공부한 뒤 2023년 마침내 KBS 성우 공채에 합격했다.
수빈과 처음 만났을 때 박씨는 수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수빈에게서 심리적인 부담감이 엿보였다. 그는 마이크 앞에 수빈을 무작정 세워놓기로 수업 방식을 결정했다. 박씨는 “긴장되는 상황에 무조건 적응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씨의 노력에 수빈도 변했다. 수빈은 수업 초기에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피드백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용해서 입 밖으로 어떻게든 표현을 하려고 노력을 하는 단계”로 바뀌었다. 기자가 와서 더 긴장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박씨는 “오히려 덜 긴장하더라”며 “기특하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관계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호칭은 ‘성우님’에서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수빈이 스스로가 의도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수빈의 눈이 커졌고, 그때 박씨는 성취감을 느꼈다. 수빈도 “혼자 연습할 때 잘되지 않던 부분이 잘되기 시작했다”며 박씨에게 장문으로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이날도 박씨는 수빈에게 과제를 내줬다. 수업에서 부족했던 호흡을 채우기 위해 ‘무호흡으로 최대한 많이 읽기’와 조깅 30분 하기가 이번 과제다. 그는 수빈이 “설령 이루지 못하더라도 달려가던 그 시간이 후회 없이 아름다웠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