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인 지난 7월17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워싱턴 일대는 잿빛 연기로 뒤덮였다.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인 워싱턴은 좀처럼 공기오염을 보기 어려운 지역이지만, 이날은 공기 속에서 매캐한 그을음 냄새가 날 정도였다. 워싱턴에 거주하는 주민 스튜어트 베더리는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비도 오지 않는데 해 뜰 무렵에 일어나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정말 이상하다. 마치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큰 바비큐 파티를 열고 있는 것 같은 냄새도 난다”고 말했다.
워싱턴과 인근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주민들에게 그 주말은 ‘잿빛 주말’로 기억된다. 워싱턴 일대 대부분의 지역에 적색경고(Code Red·건강에 해로움, 공기질지수 151∼200)가 발령됐고, 일부 지역은 자색경고(Code Purple·건강에 매우 해로움, 공기질지수 201∼300) 단계에 도달한 곳도 있었다. 보건 당국은 어린이, 노인, 심폐질환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야외활동을 줄이도록 권고했다.
워싱턴 일대가 7월 중순 잿빛 연기로 가득했던 이유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발생한 산불 연기가 제트기류를 타고 미 동북부의 3개주를 지나 워싱턴까지 번졌기 때문이다. 올여름 온타리오주에선 한때 130여건이 동시에 발생할 정도로 산불이 극심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를 기준으로 워싱턴까지는 약 800㎞다.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것보다도 더 먼 거리까지 산불 연기가 내려온 것이다.
산불에 이어 연기가 북미 전역을 걸쳐 이동하며 ‘산불철’에 이은 ‘연기철(smoke season)’이라는 말도 나왔다. 산불 연기의 영향을 받은 미국 내 주로는 미네소타주와 위스콘신주, 일리노이주, 미시간주, 오하이오주, 펜실베이니아주, 뉴욕주, 뉴저지주, 매사추세츠주,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등이 꼽힌다. 사실상 동북부의 전 지역이다. 이번 동부 산불 연기 사태는 2023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약 1억2000만명이 피해 영향권에 든 것으로 파악된다.
여름철 북미 산불의 원인으로는 번개가 흔히 꼽힌다. 여름철 뇌우가 지나가면서 발생한 번개가 마른 나무나 숲에 떨어져 불씨를 만든다. 비는 거의 내리지 않고 번개만 치는 ‘건조 뇌우’가 특히 위험하다. 여기에 기후변화로 인한 평균기온 상승, 장기간 가뭄과 숲의 사막화 등으로 불이 잘 번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폭염과 가뭄을 겪은 숲은 바싹 마른 장작더미와 유사한 환경이다.
올해 미국에서는 역대 최고기온은 물론 월별·일별 최고기온과 최저기온 기록을 대거 갈아치우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몬태나와 미네소타처럼 비교적 서늘한 지역에서도 기존 최고기온 기록을 크게 뛰어넘었고, 7월 중순에는 화씨 100도(섭씨 38도)가 넘는 더위가 캐나다 국경까지 이어졌다.
번개 자체도 폭염의 영향으로 더 늘었다. 폭염으로 뜨거워진 공기는 빠르게 상승하고, 상승한 공기가 거대한 적란운(뇌우 구름)을 만들며, 그 안에서 얼음 입자들이 충돌하면서 전하(전기를 만드는 성질)가 분리돼 번개가 발생한다. 올해 미 동부는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기 때문에 뇌우 발생 가능성이 크게 증가했다. 멕시코만(미국만)과 대서양에서 습한 공기도 계속 유입됐다.
비영리 연구기관인 클라이밋 센트럴의 기후과학자 재커리 레이브는 CNN에 이번 여름의 연이은 산불과 연기 사태와 관련해 “화석연료 연소는 이미 지역사회에 분명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2050년이나 2100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복합재난의 시대… 정치전 계속
기록적인 폭염과 함께 북미를 덮친 기후재난은 산불과 연기만이 아니었다. 동북부가 산불 연기로 신음하던 같은 시기 미국 남부 텍사스에서는 ‘1000년에 한 번’ 수준으로 평가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며 돌발홍수 피해를 봤다. 특히 텍사스 힐컨트리에는 7월 15, 16일 이틀 동안 거의 1년치 비가 한꺼번에 내렸다. 메마른 지형을 거대한 홍수 물결이 휩쓸면서 강과 하천은 기록적인 수위까지 불어났고 주민들은 집 안에 고립됐다.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로 대기가 더 많은 수증기를 머금게 되면서 극한 강우의 강도와 빈도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폭염과 산불, 홍수, 대기오염이 한 계절에 겹쳐 나타나는 현상은 새로운 기후위기의 특징으로 꼽힌다. 미국 국립과학원(NASEM)은 ‘복합 및 연쇄 재난에 대한 회복력’ 보고서에서 둘 이상의 극한기상 현상이 동시에 또는 연쇄적으로 발생해 피해를 증폭시키는 현상을 ‘복합재난(compound disasters)’으로 정의했다. 보고서는 과거에는 재난이 하나씩 발생해 지역사회가 복구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재난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재난이 이어지며 피해가 누적되는 것이 새로운 현실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기후위기가 일상이 되고 있지만 미국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정치적 성향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2025년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4%는 지난 1년 동안 폭염이나 홍수 등 다섯 가지 유형의 극한기상 현상 가운데 적어도 하나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기후변화가 극한 기상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인식했으며, 특히 폭염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보다 자신이 겪은 극한기상을 기후변화와 연결해 보는 비율이 낮았고, 극한기상 현상을 경험했다고 답한 비율 자체도 더 낮았다. 같은 폭염과 산불, 같은 연기를 경험하고도 이를 해석하는 방식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른 것이다.
캐나다 산불 연기가 워싱턴까지 뒤덮었던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미국이 “더러운 공기에 침공당했다”며 “이 오염으로 발생한 비용은 캐나다가 현재 부담하고 있는 관세에 반드시 추가돼야 한다”고 적었다. 이어 오하이오주 공화당 소속 버니 모레노 상원의원과 미시간주를 지역구로 둔 공화당 하원의원 4명(잭 버그먼, 존 제임스, 리사 맥클레인, 존 물레나르 의원)도 캐나다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반면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기후변화 대응은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책임”이라며 산불을 특정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기보다 기후위기의 결과로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