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초제 버리니 땅이 살아났다”… 황폐한 포도밭 천국으로 바꾼 벤지거의 고집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⑥벤지거 패밀리 와이너리>

소노마 카운티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선구자

지속가능와인재배연합 ‘그린 메달’ 원년 멤버

제초제·살충제 대신 양·염소가 잡초 제거

데메터 인증 받은 포도로 건강한 와인 생산

 

야자수와 연못이 어우러지는 벤지거 포도밭 전경. 최현태 기자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양떼와 소떼는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닭들은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먹이를 찾아 종종걸음 칩니다. 키다리 야자수로 꾸민 연못의 분수는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한낮의 열기를 식히고, 물결처럼 춤을 추는 언덕에선 초록 잎사귀 사이로 자라는 건강한 포도가 나 좀 봐달라며 예쁜 미소를 건냅니다. 다양한 동물을 키우는 여느 농장과 다름없는 이곳은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Sonoma County) 바이오다이내믹(Biodynamic) 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하는 선구자 벤지거 패밀리 와이너리(Benziger Family Winery). 제초제 한 방울 뿌리지 않고도 동물과 식물이 서로를 돌보며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니, 포도밭에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꿈틀거립니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서혜진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서혜진 기자

◆바이오다이내믹 선구자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 글렌 엘렌(Glen Ellen)에 있는 와이너리로 들어서자 소노마 마운틴 자락, 수백만년 전 화산 폭발이 남긴 거대한 분지 안에 그림처럼 물결치는 아름다운 포도밭이 펼쳐져 탄성이 터집니다. 360도 사방으로 일조량과 배수 조건이 제각각인 이 독특한 지형 위에서 양과 염소가 포도밭 사이 잡초를 뜯어먹는 목가적인 풍경이 단숨에 눈길을 잡아 끕니다. 포도밭에서 오너 크리스 벤지거(Chris Benziger)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합니다. 

 

벤지거  포도밭. 최현태 기자
벤지거 포도밭. 최현태 기자

1980년 막내 크리스의 부친 브루노 벤지거(Bruno Benziger)가 장남 마이크(Mike)와 85에이커 규모의 이 땅을 매입해 세운 벤지거 패밀리 와이너리는 미국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의 개척자로 불립니다. 바이오다이내믹은 1924년 오스트리아(Austria)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가 처음 제시한 농법으로, 유기농을 넘어서 농장 전체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다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소똥, 소뿔, 포도나뭇가지로 자연 비료를 만들고 가지치기, 수확 시기까지 달의 변화와 천체 리듬에 맞춰 결정합니다.

 

벤지거 분지형 포도밭. 페이스북
크리스 벤지거. 최현태 기자

뉴욕 출신의 마이크는 아내 메리와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정착한 뒤, 1980년 할로윈 데이에 아버지 브루노와 함께 소노마 마운틴의 유서 깊은 ‘웨게너 랜치(Wegener Ranch)’ 부지를 사들입니다. 1981년 첫 수확 당시 양조장 건물조차 완공되지 않아 스테인리스 탱크가 없었습니다. 벤지거 가족은 급한 대로 우유 운반용 탱크트럭 2대를 빌려 소비뇽 블랑을 발효시켰는데, 이 와인이 캘리포니아 주 품평회에서 금메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이후 대량 생산 브랜드 ‘글렌 엘런(Glen Ellen)’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지만 과도한 화학 비료 사용으로 땅이 황폐해지고 필록세라 피해까지 겹치며 와인 품질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에 벤지거 가족은 1990년대 중반 대량 생산 브랜드를 매각하고 친환경 농법으로의 전면 전환을 선언하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벤지거는 화학비료를 끊고 바이오다이내믹 방식으로 전환, 소노마 카운티와 나파 카운티를 통틀어 2000년 가장 처음으로 데메터(Demeter)로부터 정식 바이오다이내믹 인증을 받았습니다.

 

벤지거 전경. 최현태 기자
수선화가 핀 벤지거 연못. 최현태 기자

바이오다이내믹은 포도밭을 하나의 독립된 ‘살아있는 유기체’로 여기고 자연의 순환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핵심입니다. 포도밭 한가운데는 250종 이상의 꽃과 식물이 자라는 ‘인섹터리(Insectary·곤충 정원)’가 조성돼 있습니다. 이 정원은 해충을 잡아먹는 말벌, 무당벌레 같은 이로운 포식성 곤충과 새들을 불러들이는 천연 요새 역할을 합니다. 화학 제초제나 살충제 대신 양과 염소를 풀어 잡초를 뜯게 하고, 소와 닭을 키워 자연 퇴비를 얻습니다. 올빼미와 파랑새 둥지를 곳곳에 설치해 포도나무를 갉아먹는 두더지 등 설치류를 자연스럽게 통제합니다. 화학 제품이 들어설 자리에는 쐐기풀, 카모마일, 서양톱풀 같은 허브와 동물의 뼈로 만든 천연 비료와 차(Tea)가 대신합니다. 

 

벤지거 선인장. 최현태 기자

벤지거는 이처럼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개척하고 건강한 와인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캘리포니아 지속가능 와인재배 연합(California Sustainable Winegrowing Alliance·CSWA)이 주는 그린메달 환경상을 2015년 최초로 받았습니다. CSWA는 캘리포니아 와인협회(Wine Institute)와 캘리포니아 포도재배자협회(California Association of Winegrape Growers·CAWG)가 2003년 공동 설립한 비영리기구로, 캘리포니아 와인업계의 지속가능 농법 인증과 교육을 총괄합니다. 또 2015년부터 리더상, 환경상, 커뮤니티상, 비즈니스상 등 4개 분야 수상자를 선정해 그린 메달을 수여합니다.

 

벤지거 양떼. 최현태 기자

포도밭 투어에 나선 크리스가 직접 양떼몰이 시범을 보입니다. 휘파람 소리에 맞춰 양들이 우르르 몰려가게 만드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목동입니다. 크리스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에 양들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양들이 지나간 자리는 잡초가 사라지고 토양이 비옥해진답니다. 양들이 풀을 뜯으면서 흙 속에 부스러기(잔여물)를 밀어 넣어주기 때문에 지렁이들이 그걸 먹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토양이 눌려 굳는 걸 막을 수 있어요. 양들이 대신 풀을 뜯어주니까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제초제인 라운드업(Round-up)을 쓸 필요가 없고, 뒤로는 천연 비료까지 남겨주죠. 트랙터나 제초 장비 같은 무거운 기계로 밭을 관리하면 바퀴 무게 때문에 흙이 눌려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그런데 양이나 염소는 동물이라 몸무게가 가볍고 발자국도 분산되기 때문에, 기계처럼 토양 구조를 망가뜨리지 않아 흙이 계속 부드럽고 통기성이 좋은 상태를 유지해 뿌리와 미생물, 지렁이가 잘 살 수 있답니다.”

 

벤지거 장미정원. 최현태 기자

벤지거는 2015년 미국의 대형 와인 전문 기업인 ‘더 와인 그룹(The Wine Group)’에 매각됐지만 와이너리의 정통성과 가문의 유산을 유지하기 위해 벤지거 형제들을 요직에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크리스는 와이너리의 핵심 가치인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생태계를 관리하고 홈 랜치 포도밭을 총괄하는 실무적 리더 역할을 수행합니다.

 

벤지거 와인 에스테이트·시그나테라 시리즈.  페이스북
벤지거 시그나테라 시리즈. 최현태 기자

◆플래그십 트리뷰트에서 서늘한 해안 피노 누아까지

 

벤지거가 자리한 땅 자체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수백만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칼데라(Caldera) 지형이어서 방향마다 일조량과 배수 조건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기후와 토양의 성질이 고스란히 와인에 투영돼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합니다.

 

벤지거의 와인 라인업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가장 상위에는 소노마 마운틴 홈 랜치에서 나는 ‘에스테이트(Estate)’ 와인들이 자리합니다. 100% 데메터 인증 바이오다이내믹 포도로 빚는 플래그십 ‘트리뷰트’와 ‘쓰리 블록스’ 카베르네 소비뇽이 대표적입니다. 그 아래로는 ‘시그나테라(Signaterra)’ 시리즈가 있는데, 소노마 카운티 곳곳의 싱글 빈야드에서 나는 개성 있는 구획들을 따로 병입하는 프리미엄 라인입니다. 카네로스 산지아코모 빈야드의 ‘웨스트 로우즈 샤르도네’, 소노마 코스트의 ‘데 코엘로 아르보레 사크라 피노 누아’, 선니 슬로프 빈야드의 카베르네 소비뇽 등이 이 시리즈에 속합니다. 좀 더 폭넓고 접근하기 쉬운 가격대에서는 소노마 카운티 여러 AVA의 포도를 아우르는 ‘아펠사시옹 시리즈(Appellation Series)’가 있어 소노마 코스트 피노 누아, 러시안 리버 밸리 샤르도네 등 지역색이 뚜렷한 와인을 선보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진판델, 시라 같은 레드부터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등 화이트까지 캘리포니아 클래식 품종을 폭넓게 다룹니다.

 

벤지거 트리뷰트 에스테이트 레드 블렌드. 최현태 기자

▶벤지거 트리뷰트 에스테이트 레드 블렌드(Tribute Estate Red Blend)

 

달콤한 흙내음과 블랙베리, 자두 아로마에 정향과 감초, 향신료 힌트가 복합적으로 피어오릅니다. 입에서는 잘 익은 체리와 자두 풍미 뒤로 미드 팔레트에서 쌉싸름한 다크·밀크 초콜릿과 코코아 파우더의 크리미한 질감이 두드러집니다. 풍부한 산미가 과실미의 무거움을 단단하게 잡아주고 부드럽게 정제된 탄닌과 함께 길고 우아한 피니시로 마무리돼 장기 숙성 잠재력도 높은 와인입니다. 소노마 카운티에서 처음으로 데메터 인증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전면 도입해 만든 역사적인 보르도 스타일 블렌드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뼈대로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말벡, 쁘띠 베르도를 더하는데 블렌딩 비율은 빈티지마다 미세하게 조정됩니다.

 

벤지거 트리뷰트 에스테이트 레드 블렌드. 페이스북

포도밭은 마야카마스 산맥과 소노마 산맥 사이 분지에 자리해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서늘한 일교차가 뚜렷합니다. 여기에 태평양에서 밀려드는 해안가 안개가 유입되며 포도가 신선한 산도와 풍미를 천천히 쌓아갑니다. 100% 데메터 인증 바이오다이내믹 포도만 사용하며, 첨단 광학 선별기로 최상급 알갱이만 골라낸 뒤 대형 오픈 탑 발효조에서 자연 효모로 발효합니다. 프랑스산 오크 배럴에서 숙성한 뒤에는 정제와 여과 과정을 최소화하거나 생략한 채 병입해 와인 본연의 질감을 살렸습니다.

 

벤지거 데 코엘로 아르보레 사크라 피노누아. 최현태 기자

▶벤지거 데 코엘로 아르보레 사크라(De Coelo Arbore Sacra) 피노누아

 

체리와 야생 딸기, 홍차 향이 화사하게 겹겹이 피어오르고, 입에서는 붉은 과실 풍미에 세이지 같은 허브와 스파이스 힌트가 어우러지며 생동감 있게 솟아오르는 피니시로 이어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우아하게 익어가는 잠재력을 지닌 와인입니다. 밝은 산미와 단단한 탄닌, 피니시에 감도는 숲속의 흙내음, 홍차 풍미는 전형적인 쿨클라이밋 피노 누아의 표정입니다.

 

태평양에서 단 8㎞ 떨어진 소노마 코스트의 극단적 해안 기후에서 자라는 피노 누아로 만듭니다. 포도밭은 해발 약 228m 남동향 능선, 토양은 점토가 섞인 골드 리지(Gold Ridge)입니다. 골드리지는 소노마 카운티를 대표하는 사질양토로, 뛰어난 배수성과 적절한 수분 보유력을 갖춰 세계적인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를 탄생시키는 핵심 테루아로 평가받습니다.

 

벤지거 라 레이나(La Reyna) 에스테이트 피노누아. 페이스북

피노 누아는 칼레라(Calera) 클론으로 데메터 인증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으로 재배됩니다. 칼레라를 설립한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의 선구자인 조쉬 젠슨(Josh Jensen)이 프랑스 부르고뉴의 전설적인 와이너리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DRC)에서 일하던 중, 몰래 나뭇가지를 주머니에 넣어 미국으로 가져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클론은 캘리포니아 토양에 완벽히 적응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헤리티지 클론’으로 분류되며 많은 피노 누아 생산자들이 이 클론으로 재배합니다. 4~5일간 저온 침출로 색과 부드러운 탄닌을 끌어낸 뒤 자연 효모로 발효하고, 프렌치 오크에서 젖산 발효를 포함해 10개월간 숙성합니다.

 

벤지거 웨스트 로우즈 샤르도네. 최현태 기자

▶벤지거 웨스트 로우즈 샤르도네(West Rows Chardonnay)

 

과수원에서 갓 딴 듯한 신선한 사과와 잘 익은 복숭아·살구 같은 핵과류 향이 화사하게 열리고, 그 위로 커스터드 크림과 시나몬·바닐라 같은 부드러운 베이킹 스파이스 힌트가 겹겹이 얹어집니다. 입에 넣으면 싱그러운 청사과와 시트러스, 바바리안 크림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리(Lees) 숙성에서 비롯된 크리미하고 실키한 질감이 이 와인의 개성인데, 카네로스 특유의 산뜻한 산미가 팽팽하게 균형을 잡아주면서 과하게 무거워지지 않고 고급스럽고 긴 여운으로 마무리됩니다. 홀 클러스터 프레스로 맑은 과즙만 추출, 프랑스산·헝가리산 오크 배럴에서 발효합니다. 병입 전까지 리와 함께 숙성하며 발효 과정에서 2주에 한 번씩 저어주는 바토나주(Bâtonnage)로 질감과 바디감을 끌어 올립니다.

 

벤지거 웨스트 로우즈 샤르도네. 페이스북

로스 카네로스(Los Carneros)는 샌파블로 만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덕에 캘리포니아에서도 손꼽히는 샤르도네 산지로 통합니다. 그중에서도 산지아코모 홈 랜치 빈야드(Sangiacomo Home Ranch Vineyard)는 ‘카네로스 샤르도네의 성지’로 불리는 곳입니다. 벤지거는 이 빈야드에서도 가장 응축된 풍미를 내는 ‘웨스트 로우즈’ 구획만 따로 떼어 샤르도네를 빚습니다. 미국의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롭 리포트(Robb Report)는 벤지거 웨스트 로우즈 2022 빈티지를 ‘21세기 최고의 캘리포니아 샤르도네 50선’에 선정했습니다. <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⑦에서 계속>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