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은 상당 부분이 손상될 때까지 좀처럼 이상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간암이 생겨도 초기에는 뚜렷한 증상이 없어 황달이나 복수, 체중 감소 등이 나타난 뒤에야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암을 일찍 찾아내는 정기검진과 함께 간암의 주요 원인인 만성 B형간염을 더 이른 단계부터 치료해야 하는 이유다.
올해 만성 B형간염 진료지침도 크게 바뀌었다. 과거에는 간세포 손상을 보여주는 간효소수치(ALT)가 상승해야 항바이러스 치료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는 간수치가 정상이어도 혈액 속 B형간염바이러스(HBV DNA)가 일정 수준 이상이면 치료를 권고한다. 간 손상이 나타난 뒤 대응하는 데서 벗어나 바이러스 증식을 미리 억제해 간경변증과 간암을 예방하는 방향으로 치료의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이다.
◆증상 땐 이미 진행… 간암 고위험군 6달마다 검진
◆간수치 정상이어도 바이러스 많으면 치료
특히 B형간염은 바이러스가 많이 검출돼도 ALT가 정상이라는 이유로 치료하지 않고 경과를 관찰하는 환자가 적지 않았다. ALT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간세포가 손상될 때 혈액으로 빠져나오는 효소로, 간세포 손상과 염증 정도를 판단하는 지표로 활용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ALT는 이미 발생한 간세포 손상을 보여주는 후행 지표다. 바이러스가 계속 증식해도 뚜렷한 염증반응이 나타나지 않으면 정상 범위에 머물 수 있다. 간수치가 정상인 동안에도 간섬유화가 진행되고 간암 위험이 누적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쌓이면서 치료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최근 진료지침이 치료 판단의 중심을 ALT에서 바이러스 양으로 옮긴 것도 간암이 발생하기 전에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대한간학회는 지난 6월 혈액 1㎖당 HBV DNA가 2000IU 이상 1억IU 이하인 ‘중등도 바이러스혈증’ 환자는 간수치가 정상이어도 항바이러스 치료를 시작하도록 하는 새 진료지침을 내놨다. 환자 분류도 HBV DNA 농도에 따라 고·중등도·저바이러스혈증으로 단순화했다. 기존 분류에 명확히 들어맞지 않아 치료 여부가 불분명했던 ‘회색지대’ 환자를 줄이고, 간암 위험이 높은 환자를 더 일찍 치료하기 위해서다.
간경변증이 있는 환자는 ALT와 관계없이 바이러스가 검출되면 치료한다. 간경변증이 없는 고바이러스혈증 환자는 30세 이상인지, ALT 상승이나 의미 있는 간섬유화, 간암 가족력 등 위험요인이 있는지를 종합해 치료 여부를 결정한다.
다만 새 진료지침과 건강보험 급여기준 사이에는 아직 간극이 있다. 현행 급여기준은 간경변증이 없는 환자의 경우 일정 수준 이상의 HBV DNA와 함께 AST·ALT 상승이나 중등도 이상의 염증·섬유화가 확인돼야 항바이러스제 급여를 인정한다. 새 지침에 따라 치료가 권고돼도 간수치가 정상인 일부 환자는 약값을 전액 부담해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혜원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기존 기준에서는 상당수 환자가 치료 여부가 불분명한 회색지대에 놓여 있었다며, 바이러스 수치를 중심으로 치료 대상을 명확히 하고 필요한 환자에게 더 일찍 개입하는 것이 이번 개정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실제 환자들이 혜택을 보려면 건강보험 급여기준도 신속히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