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녹초인데 침대만 누우면 말똥말똥?”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고개가 떨어질 만큼 졸렸다. 집에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해진다.
낮에 상사와 나눈 대화가 다시 떠오르고, 내일 아침까지 보내야 할 메일과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 줄줄이 생각난다.
‘빨리 자야 하는데’라는 생각까지 끼어들면 상황은 더 꼬인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고, 초조할수록 잠은 멀어진다. 몸은 지쳤는데 머릿속은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는 상태다.
수면 연구에서는 이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과각성(hyperarousal)’을 사용한다. 과각성은 별도의 질환명이 아니다. 불면증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지나친 인지적·신체적 각성을 설명하는 주요 모델 가운데 하나다.
◆국민 10명 중 1명 이상 ‘잠 못 이룸’
잠 못 이룬 사람은 최근 5년 사이 눈에 띄게 늘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년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10세 이상 국민 가운데 조사일에 ‘잠 못 이룸’을 기록한 사람은 11.9%였다.
5년 전보다 4.6%포인트 높아졌다. 잠 못 이룸을 기록한 사람들의 평균 시간은 32분이었다. 11.9%는 불면장애 유병률이 아니다. 생활시간조사는 참여자가 이틀 동안 한 일을 10분 단위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수치는 조사일에 ‘잠 못 이룸’을 기록한 사람의 비율을 집계한 것으로, 의료기관에서 진단받은 불면장애 환자 비율과는 다르다.
32분 역시 잠드는 데 걸린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한 수치가 아니다. 조사일에 ‘잠 못 이룸’을 기록한 사람들의 평균 행동시간이다. 매일 32분씩 잠들지 못했다거나 일주일에 4시간 가까이 뒤척였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몸은 지쳤는데 왜 머리는 더 또렷해질까
오랫동안 깨어 있으면 몸에는 자연스럽게 잠을 자려는 ‘수면 압력’이 쌓인다. 그렇다고 피곤한 정도에 비례해 곧바로 잠드는 것은 아니다.
잠에 대한 걱정과 반복되는 생각 같은 인지적 각성, 심박수와 자율신경계 변화 같은 신체적 각성이 함께 잠을 방해할 수 있다. 특히 침대에 누운 뒤 “오늘도 못 자면 내일 망한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면 잠 자체가 스트레스의 대상이 된다.
피곤해서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들어갔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의 피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들기 위해 낮아져야 할 각성이 충분히 가라앉지 않은 것이다.
잠을 자려고 애쓰는 행동도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몇 시간이라도 반드시 자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면 뇌는 잠드는 대신 시간을 계산하고 다음 날의 피로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잠 안 오는데 침대에서 버티면 ‘역효과’
잠이 오지 않을 때 흔히 하는 행동은 눈을 질끈 감고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다. 만성 불면 치료에서는 오히려 침대에서 깨어 있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불면증 인지행동치료(CBT-I)의 ‘자극조절’이다. 침대에서 오랫동안 걱정하고 초조해하는 일이 반복되면 뇌가 침대를 잠이 아닌 각성의 공간으로 학습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미국수면의학회는 만성 불면증 치료에 여러 방법을 결합한 CBT-I를 강하게 권고한다. 자극조절의 기본 원칙은 졸릴 때 침대로 가고, 잠이 오지 않으면 침대에서 나왔다가 다시 졸릴 때 돌아오는 것이다. 침대에서는 TV를 보거나 일을 하는 등 깨어 있는 활동을 최대한 줄인다.
몇 분이 지났는지 계속 시계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 시간을 재는 행동 자체가 ‘언제 잠들지’라는 압박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잠이 들지 않은 채 초조해진다는 느낌이 들면 조명을 어둡게 한 공간으로 나와 조용히 쉬다가 졸음이 돌아올 때 다시 침대로 가는 식이다.
◆잠들기 전 5분, ‘내일 할 일’ 적었더니 더 빨리 잠들었다
머릿속을 떠도는 내일의 일을 종이에 옮기는 방법도 연구된 적이 있다. 미국 베일러대와 에모리대 연구진은 18~30세의 건강한 성인 57명에게 잠들기 전 5분 동안 글을 쓰게 했다.
한쪽은 앞으로 며칠 동안 해야 할 일을 적었고, 다른 쪽은 최근 끝낸 일을 적었다. 이후 수면다원검사로 참가자들이 잠드는 과정을 측정했다.
그 결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적은 집단이 이미 끝낸 일을 적은 집단보다 유의하게 빨리 잠들었다.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많이 적을수록 잠드는 시간이 짧아지는 경향도 나타났다.
연구 참가자들은 종이와 펜으로 할 일을 적었다. 스마트폰 메모와 종이를 직접 비교하지 않아 휴대전화로 작성해도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메시지나 영상으로 주의가 분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종이에 직접 적는 편이 실제 연구 조건에 더 가깝다.
연구의 한계도 분명하다. 참가자는 불면증 환자가 아닌 건강한 젊은 성인이었고, 실험도 실험실에서 하룻밤 동안만 진행됐다. ‘매일 할 일을 적으면 불면증이 치료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 3회 이상·3개월 이어지면 진료 고려해야
일주일에 3회 이상 잠들기 어렵거나 자주 깨는 일이 3개월 이상 이어지고, 이 때문에 낮 동안 피로와 집중력 저하 등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면 단순히 ‘잠이 좀 안 오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
만성 불면장애는 충분히 잘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이 있는데도 수면 문제가 계속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때는 수면무호흡증이나 하지불안증후군 등 다른 수면장애, 신체·정신건강 문제, 복용 중인 약물이 영향을 주는지 살펴봐야 한다.
잠은 애쓴다고 빨리 찾아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자야 한다”는 압박이 커질수록 침대는 쉬는 곳이 아니라 잠과 씨름하는 장소가 되기 쉽다.
내일 할 일은 종이에 내려놓고, 잠이 오지 않으면 침대에서 잠시 벗어난다. 필요한 것은 잠을 억지로 붙잡는 일이 아니라 침대를 다시 잠자는 공간으로 되돌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