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서 있는 역할도 그냥 서 있지 않는다” 전민철이 마린스키에서 배운 것

“솔로르가 통상 요구받는 엄격함 대신 서정성과 우아함을 불어넣었고, 그 대비가 이 배역을 그만의 것으로 만들었다. 마임에서 황실 발레단다운 기품이 배어난다. 마린스키 수석무용수로 빠르게 올라설 자질을 모두 갖췄다.”(러시아 발레매체 바가노바투데이)

 

“고전적 접근이 뚜렷하고 로맨틱하고 전통적인 영웅역에 더 맞아 보인다. 지젤의 알브레히트로 안정된 포즈와 명확한 라인, 자신 있는 도약, 강한 회전을 갖춘 정확한 테크닉 위에 세워진 춤이다.”(〃라 노테)

마린스키발레단 ‘라 바야데르’에서 주역 솔로르를 맡은 전민철이 도약하고 있다. 마린스키발레단 제공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친 발레리노 전민철이 국내 무대에 선다. 16일과 1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리는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에서 지그프리드 왕자로 고국 팬을 만난다.

 

지난해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 국제발레콩쿠르 전체 대상을 차지한 뒤 마린스키발레단에 퍼스트 솔리스트로 입단한 전민철은 곧장 주역을 맡았다. 엄격하고 까다롭기로 이름난 러시아 현지 평단은 신참 무용수를 호평했다. 길고 아름다운 신체선, 힘들이지 않는 듯한 점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몸의 운용, 매끄럽고 안정적인 회전 등 올해 스물두 살인 발레리노가 지닌 장점을 눈여겨봤다. 특히 정교하게 다듬어진 연기에서 옛 러시아 황실때부터 내려오는 발레 전통의 품위가 배어난다는 평도 나온다. 과거 황실극장이었던 마린스키 무대와 어울리는 자세와 분위기를 갖췄다는 뜻이다.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 콩쿠르 무대의 전민철. YAGP제공

러시아 황실 발레 전통의 수호자인 마린스키발레단은 고전발레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명가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인형’ ‘라이몬다’가 모두 이 극장에서 처음 막을 올렸고, 오늘날 표준이 된 ‘백조의 호수’ 프티파·이바노프 판도 1895년 이곳에서 초연됐다. 전민철은 지난해 7월 ‘백조의 호수’ 1막 파드트루아로 이 무대에 처음 섰고 그 직후 다시 대작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로 첫 주역을 맡았다. 이후 한 시즌 동안 ‘지젤’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인형’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라이몬다’ ‘파라오의 딸’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 무용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전민철이 가장 먼저 체득한 마린스키의 유산은 연기였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민철은 “(지난 1년간)가장 크게 느낀 것은 역시 연기적인 부분”이라며“마린스키 무대를 처음 보면서 굉장히 놀랐고 이것은 반드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민철은 무대에 오르는 모든 인물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고 한다. 주역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는 역할도 그냥 서 있지 않습니다. 그 인물이 가진 감정을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 몸으로 표현합니다.” 무대 뒤편에서 깃발을 들고 선 경비병 한 사람조차 나름의 해석을 거쳐 연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젤’ 1막에서 농부 로이스로 신분을 감춘 알브레히트를 연기중인 전민철. 마린스키발레단 제공

“선생님들이 가장 주의 깊게 이야기하시는 것도 연기입니다. 같은 마임, 같은 동작이라도 캐릭터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똑같이 ‘너’를 가리키는 동작이라도 지그프리드라면 지그프리드다운 움직임이어야 하고 로미오라면 로미오다운 움직임이어야 합니다. 움직임의 속도와 힘만으로도 인물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습니다.”

 

곧 고국 팬에게 선보일 지그프리드 역은 지난해 12월 마린스키에서 데뷔한 배역이다. 그는 이 왕자를 결혼하기 싫어하는 인물로 읽는다.

마린스키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 전민철이 6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된 젊은 왕자이자 인생의 변화를 앞둔 인물입니다. 1막 1장 생일잔치를 즐기는 장면에서도 혼자 멜랑콜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결혼할 상대들을 데려와도 계속 거절의 뜻을 표현합니다. ‘이 친구는 지금 결혼을 원하지 않는구나, 결혼에 대한 생각이 아직 멀리 있는 사람이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오데트를 만나는 장면에 대한 해석도 통념과 다르다. 사냥을 나갔다가 백조를 발견한 왕자의 첫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호기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데트가 하는 말과 백조 군무, 그리고 오데트가 처한 상황을 보면서 이 존재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며 “두 사람이 상황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사랑으로 발전한다. 이후 지그프리드는 흑조에게 속고 그 아름다움에 홀려 사랑을 맹세한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후회하고 절망한다”고 자신이 만든 지그프리드를 설명했다.

전민철이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목은 왕자의 춤이 거의 없는 1막 2장 호숫가 장면이다. “객석에서 바라본 백조들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장면에는 왕자의 솔로가 없고 춤 분량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백조 군무가 펼쳐지는 가운데 오데트가 첫 만남에서 왕자를 피하고 왕자가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백조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왕자와 처음 만나는 장면까지가 제게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입니다.”

 

지난 1년 사이 가장 크게 달라진 것으로는 마린스키를 품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일상을 꼽았다.

 

“춤에 대한 배움도 많았지만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제 삶 자체입니다. 러시아에 가기 전에는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연습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일상을 보낼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이 늘었고 공연을 보러 다니며 영감을 채울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동료들의 지지와 발레를 아끼는 도시의 공기, 제정시대 풍경이 남은 거리를 걷는 일이 모두 젊은 무용수 성장의 자양분이 됐다. 그는 “발레단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까지 아름답게 느껴진다”며 “그 길에서 많은 생각을 했고 그런 시간이 제 춤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스물두 살 청년은 한참을 망설였다. 발레단이 자신을 어떤 무용수로 생각하는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고 그는 답했다. 다만 단장이 계속 주역과 새로운 무대의 기회를 주고 같은 작품을 반복할 기회도 주며 여러 무용수와 파트너를 이룰 수 있도록 공연을 만들어준다고 전했다. 또 관객에게 직접 들은 말도 꺼냈다.

“처음 갔을 때는 몸이 아름답다거나 손이 아름답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왜 마린스키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았다, 그 에너지를 느꼈다’고 말씀해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같은 작품을 공연하면서도 어떻게 매번 변화를 주고 계속 성장할 수 있느냐’는 말씀을 많이 해주십니다.”

 

관객이 자신의 발전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항상 되새깁니다. 무수히 노력하고 스스로 많이 생각하며 공연을 올리면 그날의 컨디션이 어떻든 과정에서 큰 배움을 얻습니다. 그만큼 노력했다면 후회도 크지 않습니다.”

 

예술의전당·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14일부터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