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에 담보로 맡겨진 기업·공공기관 채권의 절반 이상이 화석연료·고탄소 업종에서 발행된 것으로 분석됐다. 정부가 녹색금융 활성화를 연일 강조하는 가운데 한국은행의 담보 체계가 이 같은 정책 기조와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국내 기후·환경단체 녹색전환연구소와 영국 런던에 기반을 둔 국제 싱크탱크 ‘포지티브머니’(Positive Money)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행 담보 체계에서 인정된 회사채 및 공공기관 채권의 53%가 ‘화석연료’ 및 ‘탄소 고배출’ 부문에서 발행한 채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친환경 사업에 투자하는 녹색채권의 비중은 약 2%에 그쳤다. 더불어민주당 정태호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한국은행 자료를 기반으로 1368개 채권을 분석한 결과다.
◆ 담보 절반이 ‘고탄소’… 녹색채권은 2%
한국은행은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거나 금융기관 간 결제에 문제가 생길 상황에 대비해 채권 등을 담보로 받는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 담보를 처분해 손실을 막기 위해서다. 지난해 말 기준 금융기관들이 한국은행에 맡긴 담보의 인정금액은 총 168조2000억원이다.
녹색전환연구소와 포지티브머니는 이 가운데 탄소배출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업·공공기관 채권 23조원을 들여다봤다. 이를 ‘화석연료’, ‘탄소 고배출’, ‘녹색’, ‘중립’ 등 4개로 분류해 분석을 진행했다.
‘화석연료’에는 석유·액화천연가스(LNG) 등 화석연료를 가공 및 판매해 수익을 내는 기업·공공기관이 발행한 채권이, ‘탄소 고배출’에는 철강·화학·금속 등 탄소 배출이 많은 업종이 발행한 채권이 포함됐다. ‘녹색’은 친환경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된 채권이다.
분석 결과, 탄소 고배출 채권이 33%, 화석연료 채권이 20%로 전체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반면 녹색채권(지속가능채권 포함)은 2%에 불과했다.
지난 5년새 회사채·공공기관채 담보 규모가 빠르게 불어났지만 그 수혜는 주로 화석연료 부문에 집중됐다. 화석연료 채권 비중은 2021년 9%에서 2025년 20%로 두 배 이상 늘어난 반면 녹색채권은 같은 기간 4%에서 2%로 반토막났다.
특히 전력·가스 공기업이 발행한 채권에 대한 쏠림이 두드러졌다. 한국전력과 한국가스공사가 발행한 채권만 전체 담보의 18%를 차지했다. 문제는 이들 공기업의 사업구조가 여전히 화석연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 기준 한전과 발전자회사의 화석연료 발전 비중은 63.4%로 나타났다.
중앙은행 담보로 인정받는 자산은 유동성이 높아져 발행비용이 낮아지는 효과를 누린다. 해당 산업이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평향이 금융시장에 ‘화석연료 사업에 자금을 대는 것이 유리하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단순히 녹색채권의 발행량 자체가 적기 때문이라고 탓하기도 어렵다.
지난해 기준 전체 채권 상장잔액 2908조원 가운데 녹색채권의 비중은 1%(약 28조5000억원) 수준이다. 반면 한국은행 담보에서 녹색채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0.41%에 불과했다. 전체 채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비교해도 한국은행 담보에서는 그보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 녹색채권 ‘헤어컷’ 두 배…담보가치도 불리
근본적 원인 중 하나로는 녹색채권의 ‘높은 담보 할인율’(헤어컷)이 꼽힌다.
금융기관이 채권을 담보로 맡기면 한국은행은 채권 종류, 신용등급, 만기 등을 따져 시장가치의 일부를 깎아 담보가치를 인정한다. 할인율이 높을수록 같은 가격의 채권을 맡겨도 인정받는 가치는 낮아지는 것이다.
2025년 기준 녹색채권의 할인율은 8.7%로 전체 채권 평균(4.3%)의 두 배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100만원짜리 채권을 담보로 맡기면 일반채권은 95만7000원으로 인정받지만, 녹색채권은 91만3000원만 인정받은 셈이다.
이러한 격차는 최근 들어 더욱 커졌다. 2022년에는 녹색채권과 전체 채권의 할인율이 3.9%로 같았지만 이후 차이가 벌어졌다. 녹색채권 할인율은 2023년 6.7%, 2024년 5.7%를 기록한 뒤 2025년 8.7%까지 높아졌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주로 발전사들이 채권 발행 규모가 크고 신용도가 높은 편이어서 은행들이 많이 사들이고, 이를 다시 한국은행에 담보로 맡긴다”며 “반면 녹색채권은 주로 기업이 발행하는데, 이러한 회사채는 공공기관채보다 안정성이 낮아 담보할인율이 높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이 녹색채권을 별도 담보 항목으로 구분하고, 담보자산의 탄소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기원 녹색전환연구소 경제전환팀 팀장은 “현재 녹색채권은 2023년 담보 인정 범위를 확대하는 과정에 일부 포함됐을 뿐 별도의 담보 카테고리로 구분돼 있지 않다”며 “녹색채권을 명시적인 담보 항목으로 만들어 금융시장에 분명한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담보채권 가운데 녹색·고탄소 채권의 비중과 탄소배출 지표 등을 국제 기준에 맞춰 정기적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