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AI 시대일수록 인간의 사고력 담은 책의 가치는 더 커져” [세계초대석]

출판은 더 이상 ‘종이책 산업’ 아냐
전자책·영화·AI학습데이터 등 확장
모든 콘텐츠 산업의 뿌리는 텍스트

독서는 미래 인재 키우는 국가전략
정책 통합할 ‘국가독서위원회’ 제안
AI시대 지식 인프라… 예산 확대 필요

서울국제도서전 전시공간 확대해
亞대표 콘텐츠 비즈 플랫폼 키울 것
경쟁력 갖춘 K출판, 또 다른 성장축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문장을 대신 쓰고 창작의 경계까지 밀고 들어오는 시대다. 이 거센 변화 앞에서 책은 과연 낡은 매체로 밀려나는 것일까.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은 정반대의 답을 내놓는다.

“생성형 AI가 글을 쓰고 번역하며 인간의 창작 영역까지 빠르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AI 시대일수록 오히려 인간의 사고력과 인간다움, 그리고 그것을 담은 책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AI는 정보를 조합해 답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질문하고 어떤 가치와 책임을 담을지는 결국 인간의 몫입니다.”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이 지난 7월 23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 회관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회장은 “독서는 한 개인의 교양을 넘어 국가의 사고력과 창의력, 지식 경쟁력을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라며 “AI 시대에 출판이 단순한 종이책 산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비롯해 영화·드라마, 웹툰, 게임, AI 학습데이터 등으로 확장되는 ‘텍스트 기반 IP 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희태 기자

AI가 답을 쏟아낼수록 어떤 질문을 던질지 결정하는 인간의 힘은 더 중요해지고, 책은 그 질문과 사유를 가장 깊고 오래 축적해 온 공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출판의 경계를 ‘종이책 산업’ 안에 가두지 않는다. 한 권의 책에서 출발한 콘텐츠는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넘어 영화·드라마·웹툰·게임으로 뻗어 나가고, 이제는 AI 학습데이터로까지 확장된다. 콘텐츠의 형식과 유통 방식은 끊임없이 달라져도 그 뿌리에는 결국 텍스트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출판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 창의성을 축적하는 텍스트 기반의 지식재산(IP) 산업이자, AI 시대 국가 경쟁력을 떠받치는 핵심 지식 인프라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김 회장은 1993년 한빛미디어를 창업해 국내 IT 출판 시장을 개척했다. 올해 2월 대한출판문화협회 제52대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출판산업의 체질 전환에 나섰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독서인구는 줄고 시장은 정체된 데다 생성형 AI는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질서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위기의 크기보다 변화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AI를 출판산업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끌어안고, 서울국제도서전을 단순한 책 축제를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콘텐츠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대한출판문화협회 회관에서 김 회장을 만나 AI 시대 출판의 미래와 독서문화의 변화, 그리고 K출판이 나아갈 방향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인터뷰 /2026.07.23. 유희태 기자

―AI가 글을 쓰는 시대다. 그런데도 왜 책이고, 왜 출판인가.

“AI는 문장을 아주 잘 만든다. 하지만 무엇을 질문하고 어떤 가치와 책임을 담을지는 인간의 몫이다. 얼마 전 한 문학출판사 창립기념식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사회자가 AI가 작성한 인사말과 자신이 직접 쓴 인사말을 차례로 읽었다. AI의 글은 매끄럽고 완성도가 높았다. 그러나 직접 쓴 글에는 작가들과의 추억, 오래된 술집 이야기, 함께 보낸 시간이 담겨 있었다. 다소 거칠지만, 훨씬 생생했다. 나는 이것을 잘 다듬어진 조약돌과 계곡 상류의 거친 돌의 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AI 시대에도 인간만이 담아낼 수 있는 기억과 감정, 경험은 분명 존재한다. 바로 그것이 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출판을 ‘텍스트 기반 IP 산업’이라고 정의했다. 출판에 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나.

“종이책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책은 여전히 출판의 중심이다. 하지만 출판이 종이책만 만드는 산업에 머물러서는 미래가 없다. 한 권의 책은 전자책과 오디오북이 될 수 있고 영화와 드라마, 웹툰, 게임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이제 책은 다양한 콘텐츠 산업을 움직이는 원천 IP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가치가 생겼다. 출판 콘텐츠는 AI가 학습할 수 있는 가장 신뢰도 높은 지식 데이터다. 오랫동안 검증된 콘텐츠를 축적해 온 출판계가 정당한 계약과 보상 체계 아래 AI 산업과 협력한다면 새로운 시장도 열릴 수 있다.”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인터뷰 /2026.07.23. 유희태 기자

―국민 독서율이 역대 최저 수준이다. 출판시장도 오랜 기간 침체를 겪고 있다.

“독서율 하락은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하기 어렵다. 스마트폰과 쇼트폼 콘텐츠가 사람들의 시간과 관심을 빼앗고 있다. 학령 인구 감소와 생활환경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외부 환경만 탓해서는 안 된다. 출판계도 독자가 책을 더 쉽게 발견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만들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달라진 생활방식에 맞는 콘텐츠와 유통 방식에도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한다. 무엇보다 출판산업 자체의 규모가 너무 작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영세한 구조에서는 새로운 기술에 투자하거나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쉽지 않다. 독서율 하락은 단순히 출판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사고력과 창의력, 국가의 지식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국가 차원의 독서정책도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지금까지 독서정책은 부처별로 흩어져 추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과 문화, 복지, 지역 정책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는 ‘국가독서위원회’ 같은 기구를 제안하고 싶다. 독서는 단순한 문화정책이 아니라 교육정책이고, 복지정책이며, 미래 인재를 키우는 국가전략이다. 독서문화는 단기간 캠페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의 출판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정부가 AI와 콘텐츠산업, 독서문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정책은 선언보다 실행이 중요하다. 아쉬운 점도 있다. 현재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전체 예산은 약 526억원 규모다. 출판이 교육과 문화, AI 시대의 지식 인프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족한 규모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출판계도 지원하고 지원받는 관계를 넘어 함께 정책을 만드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특히 AI 시대에는 출판을 단순한 문화산업이 아니라 국가의 지식 인프라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식이 지속해서 생산되고 책으로 출간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지식’과 AI 산업에 필요한 ‘양질의 지식데이터’도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다는 점을 정부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인터뷰 /2026.07.23. 유희태 기자

―출판계가 정부에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산 확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다. 출판은 책을 만드는 산업을 넘어 교육과 문화, 콘텐츠산업, AI를 떠받치는 기반이다. 정부가 출판을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핵심 산업으로 바라본다면 정책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출판계 역시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정부와 출판계가 함께 미래를 설계하는 동반자가 될 때 새로운 성장의 길도 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서울국제도서전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처럼 세계적인 콘텐츠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키우겠다고 했다. 어떤 구상인가.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은 세계 최대의 출판 비즈니스 플랫폼이고, 서울국제도서전은 세계에서 역동적인 독자 축제 가운데 하나다. 이제는 이 두 가지 장점을 결합해야 한다. 그동안 서울국제도서전은 일반 독자를 위한 문화행사 성격이 강했다. 앞으로는 해외 출판사와 에이전트, 콘텐츠 기업들이 찾아와 저작권 수출과 번역, 공동출판, 영상화 계약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발전해야 한다. 내년에는 전시 공간을 약 30% 확대할 계획이다. 해외 바이어와 국내 출판사를 연결하는 비즈니스 프로그램도 강화하고 저작권 상담과 계약 지원 기능도 확대하려 한다. 출판IP가 영화와 드라마, 웹툰, 게임, 오디오북, AI 콘텐츠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서울국제도서전을 아시아를 대표하는 콘텐츠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키우고 싶다.”

―올해 도서전은 흥행을 거뒀지만, 참가 기준과 운영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약 15만명의 관람객이 찾아 역대 최고의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참가 출판사의 의견을 들으면, 대부분의 경우 도서 판매도 상당히 늘었다. 하지만 참가 기준과 운영 방식에 다양한 의견이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저도 이런 지적을 도서전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제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 참가 기준과 운영 절차를 더욱 투명하게 공개하고 출판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구조를 만들겠다. 서울국제도서전은 특정 기관의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출판계 전체의 자산이다. 독자에게는 더 좋은 문화 경험을, 출판사에는 더 많은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인터뷰 /2026.07.23. 유희태 기자

―우리나라 출판계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좋은 책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해외 시장에 꾸준히 소개하고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전부터 조금씩 성장했지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이후 세계는 한국 출판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가 경험한 산업화와 민주화, 교육, 기술 혁신, 세대 갈등 같은 이야기는 세계 독자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다. 문학뿐 아니라 어린이, 인문·사회, 과학기술 책도 경쟁력이 높다. 번역과 해외 홍보, 저작권 수출, 현지 유통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체계를 갖춘다면 K출판은 K콘텐츠의 또 다른 축으로 성장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제 임기 동안 가장 꾸준히 노력하고 싶은 것은 출판계의 소통과 화합, 그리고 신뢰 회복이다. 모두 함께해야 AI도, 도서전도, K출판의 미래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김태헌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은…

 

●1962년 경북 성주 출생 ●부산 동성고·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89~1993년 두산 동아 근무 ●1993년 한빛미디어㈜ 설립 ●2013년 한빛아카데미㈜ 설립 ●2015~2016년 한국출판인회의 sbi 원장 ●2020~2021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이사 ●2021~2022년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2023년 책의 날 출판문화발전 유공자 대통령 표창 ●2026년 2월~ 대한출판문화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