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마레지구에 사는 루카 푸나로(32)는 희귀 유전질환으로 휠체어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는 최근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에어컨 없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소음을 이유로 설치를 반대하는 이웃들과 2년째 소송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냉방은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지만, 이웃들의 반대는 요지부동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달 소개한 이 사연은 유럽 대륙의 뿌리 깊은 ‘에어컨 거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기록적 폭염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미비한 냉방 인프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등에 따르면 프랑스 가정의 에어컨 설치율은 25%로 낮은 수준이고, 독일과 영국은 6%에 그친다. 약 90% 수준인 한국, 미국, 일본의 보급률과 비교하면 격차는 뚜렷하다. 기후변화가 빠른 속도로 현실화하면서 ‘에어컨이 없는 유럽’은 공중보건 위기 상황으로 부상하고 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도 “열 스트레스는 흔히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리는데, 유럽의 건물은 이런 기온을 견딜 수 있도록 지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에어컨 의존 안 해” 유럽의 자부심
◆‘자연 냉방 우선’ 에어컨 뜯어내기도
실제로 유럽 현지에서 에어컨 한 대를 설치하기까지 넘어야 하는 법적·행정적 문턱은 험난하다. 프랑스에서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 에어컨 실외기를 설치하려면 주민 전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수준의 엄격한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주간 기준으로 에어컨 작동 소음이 주변 환경보다 5데시벨(㏈) 이상 높아지면 인근 주민이 법적으로 철거를 요구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져 있어 소송에 휘말리기 일쑤다. WSJ는 파리에서는 이웃의 에어컨 설치를 막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소음 변호사’까지 등장했다고 전했다.
영국에서는 일부 지자체가 이미 설치된 에어컨의 철거를 명령해 논란이 일었다. 창문 개방과 통풍 개선 등의 ‘패시브 쿨링’(자연적 공기대류에 의한 냉방)을 모두 시도한 뒤에도 효과가 없을 때만 에어컨을 최후 수단으로 허용한다는 이른바 ‘냉방 체계’ 원칙 때문이다. 영국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올해 6월 런던 북부 캠던 지역의 한 주민은 에어컨을 영구히 철거하라는 통보를 받았고, 인근의 또 다른 주민은 모든 건축 규정을 준수했음에도 보존 구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에어컨 세 대를 뜯어내야 했다. 이에 영국 내부에서는 ‘에어컨이 금지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번졌다. 정부는 “에어컨 설치가 금지된 것은 아니며, 각 지자체는 관련 규정에 대해 상식적인 접근 방식을 취해주기를 바란다”고 해명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에어컨 설치 문제가 유럽 정치권의 이념 전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주요국 우파 성향 야당은 집권당과 좌파 진영의 엄격한 규제를 ‘이념적 탄압’으로 규정하며 공세를 펴고 있다. 독일 내 지지율 1위 정당인 극우 독일대안당(AfD)은 폭염 기록이 경신된 다음 날 “기후 이데올로기라는 제단 위에서 시민이 희생되는 일을 막겠다”고 밝혔다.
내년 대선을 앞둔 프랑스에서는 특히 치열한 격론을 벌이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극우 성향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의원은 취약 계층 시설을 시작으로 에어컨 보급 전국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RN 소속 장필리프 탕기 의원은 “프랑스에서 (에어컨 사용은) 좌파가 오랫동안 강요해 온 이념적 금기 사항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좌파 성향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전국적인 에어컨 설치 보급은 기후위기를 악화하는 잘못된 해결책”이라며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간 에어컨을 반기후주의적 산물로 규정해온 녹색당의 마린 통들리에 대표는 최근 “냉방이 금기도 만능 해법도 아니다”라며 “학교와 병원 등 취약시설에는 냉방이 필요하다”고 한 발 물러섰다.
◆“유럽의 환경 철학, ‘고집’ 폄하돼”
이런 유럽의 사정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각에 대해 유럽에서는 불쾌함을 표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유럽의 오랜 환경에 대한 철학을 미국의 언론과 호사가들이 ‘관료주의’나 ‘고집’으로 폄하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가디언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유럽인들은 에어컨을 설치해야 한다. 미국의 여름 대처 방식이 처음부터 옳았다’고 적힌 엑스(X) 게시물을 공유한 점을 예시로 들며 “에어컨 부족을 유럽 대륙이 잘못되고, 규제가 과도하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미국 논평가들로 인해 갈등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럽 전역에서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주요 원인이 관료주의나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유럽인이 지켜온 ‘탈냉방’의 자부심이 앞으로 몇 번의 여름을 더 버텨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40도를 넘는 여름이 이례적인 날씨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이 된다면 유럽의 선택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주택협회(NHF)는 현 추세가 지속한다면 2050년까지 영국 전체 주택의 90%가 심각한 과열 위험에 노출될 것으로 전망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설계된 단열 주택이 여름철에는 ‘찜통’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유럽 내에서도 폭염 대응에 대한 인식은 차츰 바뀌어 가는 모습이다. WHO 유럽 지역 산하 자문기구인 범유럽 기후·보건 위원회는 기후위기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로 선포할 것을 공식으로 촉구했다. 프랑스 정부에서도 폭염에 대비해 전국 요양시설과 의료기관에 에어컨 3만3000대를 긴급 배치했다. 미국식 전면적 에어컨 도입보다도 ‘폭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까’를 우선 고민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그레구아르 시장은 “기후위기에 적응하려면 도시의 생활 리듬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노후 주택 리모델링, 근무 시간 조정 등을 대응책으로 제시하면서도, “우리는 이미 학교에 에어컨을 구입했다”며 냉방에 절충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공기관에 우선 에어컨 설치, 가정은 생활습관 개선. 파리의 이 같은 대응은 당분간 유럽 ‘여름나기’의 표준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