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우리 4·19혁명을 기록으로 남기자.”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 저항으로 하야한 다음 날, 서울대 법대 2학년생 안동일은 서울 필동에서 고대 3학년으로 고대신문 기자로 활동 중이던 초등학교 동창 홍영유를 만났다. 아버지가 기자 출신이어서 어려서부터 기록하는 습관이 배어 있던 그 역시 그해 3월 한 달 동안 시대상황과 삶의 목표에 대해 일기형식의 ‘삶과 앎을 위한 유서’를 쓰고 난 뒤였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두 사람은 이날 이야기 끝에 4·19혁명을 기록해 보자고 의기투합했다고, 서로 바로 ‘배짱이 맞았다’고, 안동일은 기억했다.
“학생의 손으로 이룩한 4·19혁명의 기록을 혁명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의 손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습니다.”
안동일은 1960년 4월28일부터 친구 홍영유와 함께 현재 조선일보사 뒤편에 위치한 ‘고대신문 분실’을 아지트 삼아 자료 수집과 취재에 나섰다. 시위 현장에서 채록한 구호를 정리하고, 전국 학교에 요청해 학생 수기를 모으기도 했으며, 주요 시위 현장을 답사하고, 시위 참여자들을 인터뷰했다. 첫 고등학생 시위에 나선 경북사대부고 최용호군과 경북고 이대우군, 경북여고 신구자양 등.
―당시 대학생으로서 책 내용을 취재하고 집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당시 고대신문 분실을 빌려 집필 장소로 썼는데, 일주일에 한 번 신문이 발간될 때는 물러나야 해서 그때는 지방출장 등 자료수집에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 취재차 갈 때와 원고 청탁할 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번갈아 ‘특파원’이 되어 지방에 대신 취재차 내려가기도 했고, 한 친구는 등록금을 털어 집필비용을 대주기도 했었고요.”
―책을 집필하면서 세운 나름의 원칙이나 방법론이 있었을 텐데요.
“무엇보다도 팩트 체크에 중점을 두었고, 당사자들의 표현을 원음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시위에 사용한 물품(예를 들면 플래카드, 선언문, 표어 등)들을 힘껏 수집했고요. 당시 주요 일간지와 각 지방신문, 각 대학의 학보, 간행물 등과 관계자와의 면담을 통해 ‘사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4·19혁명을 다룬 책도 적지 않는데, 이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 어떤 장점이나 특징이 있을까요.
“첫째로 당시 현장에 있던 대학생이 저술했다는 점, 둘째로 대통령 하야 직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현장감이 따끈따끈하다는 점, 셋째로 저자 두 사람 모두 법대생으로 당시 시대정신과 청년의 사명감이 투철했다는 점, 넷째로 원본인 ‘기적과 환상’에는 서론에서 결론에 이르기까지 ‘청년민주한국’을 추구한 점이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0년 만에 개정판을 내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지금 이 시기, 다시 4·19를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1997년 초판을 낸 이후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지만,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와 진영 논리로 민주주의는 오히려 위기에 처한 것이 현실입니다. ‘새로운 4·19’ 출간 30주년 개정판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4·19의 생생한 목소리를 다시 전하고 4·19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극단주의와 갈등이 팽배한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외치며 공동선과 정의, 진리를 추구했던 4·19정신을 다시 되새겨야만 합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혁명 직후 서울대 학생운동조직인 ‘서울대민족통일연맹’, 소위 ‘민통’ 임원으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다는 등의 이유로, 대학생 안동일은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검거대상이 돼 2개월간 도피생활을 했다. ‘사회법학회’ 등 서클에 가입해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위한 활동을 벌이거나 군사정권 반대 운동, 통일운동을 펼치는 등 소위 운동권으로 떠돈 그였다.
도피 중인 이때 그를 위해 아버지가 남산 기슭에서 무당을 불러 아들의 안전을 비는 무속을 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아버지에게 불효, 불충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강직하고 무속을 멀리하시던 아버지가 무속을…. 아이고, 이제 내가 아버지 꿈을 해내야겠구나.’
젊은 시절 아버지의 꿈이 법조인이었기에, 기자의 길을 가려 했던 안동일은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핏줄부채’ 의식으로 대학 졸업 후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자 시대의 기록자’ 안동일의 씨가 뿌려진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후 국방부 법무관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법조인으로 활동하며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 재판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주요 인물을 옆에서 지켜본 뒤 기록으로 증언하게 된다.
―오랫동안 법조인으로 활동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활동이나 경험은 무엇이었는지요.
“변호사 개업(1978) 초기에는 긴급조치 시절이어서 김수환 추기경님의 부탁으로 긴급조치 사범으로 구속된 학생들 변론을 많이 하였고, 1979년 말부터는 김재규 사건에 매달렸습니다. 그 후로도 김현희 사건,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등 시국사건 변론을 했습니다. 방송에서 시사칼럼을 진행하고, 일간신문에도 칼럼을 싣기도 했고요(‘쓴 소리, 바른 소리’, ‘어떤 대화’, ‘새천년과 4·19정신’ 등 발간). ‘공동체의식개혁운동’이나 ‘유권자 운동’, ‘사단법인 4월회’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도 폭 넓게 참여했습니다. 기타 종교활동(동산불교대학, 동산반야회 이사장, 조계종 법률고문 등)이나 공익법인(‘관정재단’, ‘3.1문화재단’ 등)에도 이바지했고요.”
―특히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변호인 활동은 인상적으로 기억됩니다. 책도 펴내기도 했는데, 아직도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텐데요.
“당시 신군부가 짜놓은 시간표대로 재판이 속전속결로 매일 야간까지 진행하다 보니 형사법의 적법절차를 방기하고, 심지어 재판 도중 국선변호인을 불러다가 겁박하는 등 변호인의 변호권을 위축시켰으며, 이에 나는 ‘이는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는 비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변호인들이 열성적으로 변론해 후에 모범적인 변호사상을 이루었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김재규씨와 첫 만남 기억나는지요) 재판부에 요청, 밤에 남한산성에 있던 육군교도소에 가서 김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일반 접견실이 아닌 독립가옥에서 1시간 반 정도 접견했는데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합수부가 발표한 것처럼, 김씨를 완전히 패륜아로 알았지요. 어떻게 대통령의 동향이고, 자기를 키워 준 사람을 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그런데 첫 접견에서 국선 변호인의 역할과 사명을 알려드리고 당신이 왜 이런 일을 했느냐, 하나씩 이야기를 하라고 한 뒤 얘기를 듣는데, 이건 합수부 발표와 완전히 달랐어요. 저도 여러 사람을 접견해 보고 재판도 해보고 했으니까, 사람을 만나보면 알잖아요. 금방 진정성이 그대로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김재규가 손에 단주를 쥐고 있어서 같은 불자로서의 신뢰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과연 유신을 철폐하기 위해,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막기 위해,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내 목숨 한번 던지자, 죽을 결심을 하고 한 거지요. 그때 김씨는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간경화가 심했어요. 아,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다, 이건 내가 변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사장님의 활동을 보면 책으로 증언하는 ‘기록과 증언정신’도 인상적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기록을 중시하여 많은 역사적 실록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근래에는 기록에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저도 어려서부터 기록하는 습관에 탐닉했습니다. 예컨대 여행할 때도 가능한 한 꼭 여행기를 남겼고, 사회적 행사에도 참여기를 썼지요. 특히 일본 사람들의 기록습관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안 이사장은 최근 허리 시술을 받아 잠시 쉬고 있지만 평소에는 불교신자로서의 생활패턴을 지켜왔다. 그러니까 오전 6시쯤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아침 운동을 하고, 저녁에도 운동을 한 뒤 취침 전에 반드시 예불을 한다. 특히 그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수행법은 ‘나무아미타불’을 쉼 없이 염송하는 염불수행. 변호사일로 바쁠 때는 자투리 시간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한 달에 3권, 1년에 약 30권 정도의 책을 꾸준히 읽는 독서인이기도 하다. 대학 재학 중 등단 시인이 된 아내의 독서 습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0대 시절 4·19혁명에 참여하고 위대한 역사를 기록 증언했던 그는 지금의 20대 젊은이들이 다시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부상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이제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서.
“오늘날의 20대 청년들은 극단적 갈등과 혐오의 사회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통의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진짜 주인은 바로 청년 여러분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대립과 배제의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는 서로를 존중하는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세워 나가는 주체로서 용기를 내어주기를 바랍니다. 60여년 전 청년들이 피 흘려 지켜낸 민주주의의 초석 위에서 지금의 청년들이 더욱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희망의 주역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안동일 이사장은…
●1940년 청주 출생 ●경기고 및 서울대 법대 졸업 ●10·26사건의 김재규 국선 변호, KAL기 폭파사건 김현희 국선 변호,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국회 대리인 ●사단법인 ‘4월회’ 초대 회장, 대한변협 공보이사,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사장, 한국재가불자연합 상임회장 등 역임 ●현재 3·1문화재단 이사장 ●저서로는 ‘기적과 환상’, ‘쓴 소리 바른 소리’, ‘어떤 대화’, ‘새로운 4·19’, ‘나는 김현희의 실체를 보았다’,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깨달음의 길을 찾아서’, ‘행복의 길, 정토의 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