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식 전통적 공방 문법 거부 상금·랭킹·미션 등 게임장치 적극 도입 現 법조인부터 인플루언서까지 총출동 사회 갈등·콘텐츠 경쟁 맞물려 대세로
판사와 검사가 한판 붙고, 이념이 다른 참가자들이 말로 생존하며, 100명의 논객의 설득력을 순위로 가린다. 최근 방송가에 분 ‘말싸움 예능’ 바람이 점잖던 토론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100분 토론’처럼 정제된 스튜디오에서 점잖게 소비되던 토론이 서바이벌과 사회실험의 문법을 입으면서 예능의 한 장르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11일 방송가에 따르면 디즈니플러스는 오는 19일 판사와 검사가 맞붙는 법률 예능 ‘이판사판: 창과 방패’를 공개한다. 논란이 된 실제 판결을 다시 꺼내 판사와 검사가 각자의 입장에서 법정 공방을 벌이는 구도다. 과거 판결이나 사건을 전문가들이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판사와 검사가 하나의 판결을 두고 정면으로 맞서는 형식은 이례적이다. 특히 국민적 관심이 컸던 판결을 판사와 검사가 다시 해석하고, 이를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공개한다는 점에서 사안에 따라 사회적 파장도 예상된다. 민감한 법률 쟁점임에도 현직 법조인이 출연에 나선 배경에는 논쟁과 토론을 콘텐츠로 받아들이는 출연자와 시청자의 인식 변화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음 달 공개 예정인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더 커뮤니티2: 보이지 않는 손’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2024년 1월 공개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의 시즌2인 이 프로그램은 정치·젠더·계급·개방성 등 네 영역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12명의 참가자가 토론과 공동체 운영을 벌이는 이념 서바이벌 형식의 사회실험 프로그램이다. ‘데이트 비용을 더 내는 남자가 섹시한 것은 자연스럽다’, ‘빈곤의 가장 큰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등 자극적이지만 일상에서 한 번쯤 접할 법한 질문을 던지고, 참가자들의 첨예한 대립을 유도했다. 시즌2는 이념 충돌을 넘어 인간의 욕망과 시장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관찰하는 구조로 확장될 예정이다.
KBS2는 앞서 지난 1월 토론 서바이벌 예능 ‘더 로직’을 선보였다. 교수·변호사·유튜버·연예인·최고경영자(CEO) 등 각계 100명이 ‘로직 플레이어’로 참여해 논리와 설득력으로 승부를 가리는 프로그램이다. 첫 회부터 ‘주 4.5일제 도입’ 같은 현실 정책 이슈를 주제로 내세웠고, 토론 과정을 스포츠 경기처럼 연출했다.
이들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토론 프로그램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탈락·상금·랭킹·미션 등 게임 장치를 적극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논쟁이 설득과 정보 전달의 수단을 넘어 생존과 보상, 관계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장치가 된 것이다. ‘더 로직’은 100명으로 출발한 참가자들이 미션에 따라 탈락하는 구조로 구성됐고. ‘더 커뮤니티’는 투표·동맹·거래·배신을 게임 규칙으로 설계해 토론과 협상이 참가자의 생존과 탈락을 좌우하게 했다. 여기에 시청자는 어느 참가자가 더 설득력 있는지, 어떤 연합이 살아남을지 판단하는 ‘메타 플레이어’로 역할한다.
참가자 구성이 교수·정치인·전문가 등 엘리트 발언자 중심에서 전문가와 크리에이터, 인플루언서, 일반인이 한데 섞인 플레이어 중심으로 이동한 것도 기존 논쟁프로그램과의 차이다. 시청자는 이들의 정치·이념적 견해뿐 아니라 욕망, 관계 맺기 방식, 협상 능력까지 관찰하며 특정 인물에게 몰입하고 팬덤을 형성한다.
이 같은 흐름은 정치·젠더·계급·법 감정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과 OTT·유튜브 시대의 콘텐츠 경쟁이 맞물린 결과로 해석된다. 방송사는 직접적인 정치 토론 대신 게임화된 토론을 통해 갈등을 우회적으로 다루고, 시청자가 화면 앞에서 함께 계산하고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논쟁은 예능에서 다루기 무거운 소재인 만큼, 새로움을 찾아야 하는 최근 예능계에서는 오히려 주목받을 수 있는 소재가 될 수 있다”며 “유튜브 등을 통해 시청자들이 시사·정치 논쟁 콘텐츠에 익숙해진 점도 관련 소재를 다루는 부담을 낮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그는 “중요한 것은 소재를 어떻게 풀어내느냐”라며 “정치 공방이나 이슈 논쟁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출연자의 이야기와 활약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