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이미지와 폭발적인 리듬, 예기치 않은 유머로 무용이 지닌 극장적 힘을 확장해 온 스웨덴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 지난해 ‘해머’, 올해 ‘한여름 밤의 꿈’에 이어 서울시발레단의 ‘선인장(Cacti)’으로 다시 한국 관객을 만난다. 당대 무용계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이 천재 안무가는 12일 세계일보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경험이 많아질수록 창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일인지 더 잘 알게 된다”며 “이제는 예술이 어떻게 사람과 사람을 진짜로 잇고, 잠시나마 한 공간에서 저마다의 자아를 내려놓게 하는지에 더 마음이 쏠린다”고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냈다.
2025년 ‘해머’와 지난 6월 발레 도르트문트의 ‘한여름 밤의 꿈’으로 국내 관객에게 갈채를 받은 그는 8월 14∼16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서울시발레단이 창단 2주년 기념으로 만드는 더블 빌 ‘죽음과 소녀’에서 ‘선인장’을 선보인다. 2010년 네덜란드댄스씨어터(NDT)2가 초연한 그의 초기작이다. 에크만이 국내 무용단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단 혹평에서 태어난 ‘유쾌한 반격’
‘선인장’무대에선 16명의 무용수가 거대한 스크래블 타일 같은 정사각 플랫폼 위에 갇힌 듯 서서 뛰고 구르며, 손뼉과 발구르기, 호흡으로 무대 위 현악사중주의 악기가 된다. 하이든·베토벤·슈베르트의 선율 위로 능청스러운 내레이션이 흐르고, 무용수들은 저마다 선인장 하나씩을 손에 놓고선 이 모든 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예술을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느끼는 태도, 그리고 그 의미를 대신 규정하는 비평의 언어를 유쾌하게 겨눈 풍자다. 에크만이 작품 활동 초기에 받아야 했던 평단의 혹평에 상처받아 만든 작품이다.
그는 “당시는 소수의 평론가가 작품을 평가하며, 관객을 대신해 그 작품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까지 결정할 수 있었다”며 “솔직히 말하면 그런 시스템에 상당히 상처받았다. 여러 사람과 몇 달 동안 작품을 만들었는데, 단 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그 모든 것에 대해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고 창작 배경을 설명했다. “‘선인장’은 그런 취약함에서 태어났습니다. 동시에 예술을 둘러싼 모든 시스템, 그 안에 있는 저 자신까지 포함해 그 전체를 웃어넘기고 싶다는 마음에서도 시작됐습니다.”
평론보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즉자적 관객 반응이 작품 평가를 압도하는 오늘날에도 그의 문제의식은 여전하다. 에크만은 “그런 권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분산됐다”며 “관객이 작품을 충분히 경험하고 그것이 몸에 스며들 시간을 갖기도 전에, 작품은 하나의 영상 클립이나 짧은 문구, 별점, 아주 빠른 의견으로 축소된다”고 짚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인장’은 지금 더욱 유효한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왜 무언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렇게 서둘러 규정하려 할까요. 제가 반대하는 것은 정답이 하나뿐이라는 생각, 분석이 작품과의 직접적인 만남 자체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나에게 성공은 ‘진정성’이다”
1984년 스웨덴 출신인 에크만은 스웨덴왕립발레단과 네덜란드댄스시어터(NDT) 무용수로 활동하다 안무가의 길로 들어섰다. 초기작 ‘선인장’ 이후 그의 무대는 ‘물성’으로 기억된다. 2014년 ‘어 스완 레이크(A Swan Lake)’에서는 무대에 물을 채워 진짜 호수를 만들었다. 2015년 로열 스웨덴 발레의 ‘한여름 밤의 꿈’에선 무대를 짚으로 가득채우며 스웨덴 메데아상을 받았다. 2017년 파리 오페라 발레의 ‘플레이(PLAY)’에서는 볼풀 공 4만 개를 무대에 쏟아부었다. 2019년 ‘에스카피스트(Eskapist)’, 2022년 ‘해머(Hammer)’를 선보였고, 2024년에는 파리 패럴림픽 개막식의 연출과 안무를 맡았다.
세계적 안무가로서 경력이 정점에 도달한 그는 스물아홉 살 때 인터뷰에서 “10년 뒤면 평온해지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제 마흔둘이 된 에크만에게 평온에 이르렀느냐고 묻자 “어떤 면에서는 더 평온해졌고, 또 다른 면에서는 여전히 안주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직감을 신뢰하게 됐고 어려운 창작 과정도 결국 하나의 작품이 된다는 믿음도 쌓였지만, 창작이 얼마나 연약한 일인지도 매번 체감한다. 그는 “명성이 다음 작품을 좋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대가 작품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며 “사람들이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용계 슈퍼스타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그에게는 성공의 정의부터 달라졌다. 젊은 시절의 성공이 큰 무대와 수상, 특정 기관의 초청이었다면 지금의 성공은 ‘진정성(integrity)’이다. 그는 “지금 저에게 성공은 진정성을 뜻한다”며 “제 목소리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 아름답고 치밀한 창작 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 무용수들과 깊이 연결되는 것, 그리고 초연을 완성하기 위해 저 자신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을 소진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10년도 진정성을 좇는 것이 목표다. 개별 작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고 싶어 한다. 그는 “안무와 영화, 시각예술, 음악, 관객 참여, 새로운 기술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작업을 만들고 싶다”며 “예술이 어떻게 진정한 인간적 연결을 만들고, 잠시나마 한 공간에서 자아를 내려놓게 하는지에 점점 더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예술이 우리의 주의를 바꾸고,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고 여전히 믿습니다. 10년 뒤에도 건강하고 호기심을 잃지 않으며, 창작의 과정을 사랑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놀라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제 흥행작을 반복 재생산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42살의 제가 아직 상상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52살의 제가 적어도 하나쯤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