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리뷰] ‘도날드닭’, ‘노빈손’의 이우일이 그려낸 오뒷세우스

이우일의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 1,2,3/이우일/비채/1·2권 2만2000원, 3권 2만2500원

 

익살스러운 ‘도날드닭’과 ‘노빈손’ 시리즈로 사랑받은 만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이우일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만화 3권으로 펼쳐놓았다. 3년 넘게 그린 4000여 컷이 모인 결과물이다. 이우일 그림의 특징은 정교한 데생이 아니라 낙서처럼 자유로운 선과 우스꽝스러운 인체·표정이다. ‘낙서체와 명랑체’를 오가면서도 한 컷 안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우일이 신간 ‘이우일의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 3권에서 펼쳐 보인 오뒷세우스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대목. 노인 모습을 한 오뒷세우스가 아무도 당기지 못한 활에 시위를 맨 뒤 도끼 열두 자루의 자루 구멍을 겨눠 화살을 날린다. 뒤늦게 낌새를 챈 구혼자들이 경악하는 사이 본체를 드러낸 오뒷세우스는 피로 자신의 왕궁을 씻어낸다. 마지막 장면은 구혼자들을 모두 쓰러뜨린 뒤 홀로 남은 이타케의 왕. ‘귀환한 영웅의 승리’인 동시에 그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불편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비채 제공

그래서 책장을 펴면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경쾌하다가도 때로 묵직하게 가라앉는 수채화풍 그림이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이패드를 캔버스 삼아 실제 수채화를 그리듯 붓질을 한 번 한 번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장면에 따라 가볍고 투명한 수채에서 세밀한 회화적 이미지까지 오간다. 그렇다고 낙서체를 버린 것도 아니어서, 익살스러운 인물들이 여전히 등장해 정색한 수채화와 한 페이지 안에서 부딪친다.

 

방랑하는 음유시인과 세 발 까마귀를 길잡이 삼아 방대한 신화의 세계를 돌아다닌다. 1권 ‘신들의 우화’에선 미다스·다이달로스·테세우스·페르세우스·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권 ‘헤라클레스’는 헤라클레스의 탄생과 열두 과업, 죽음과 신격화까지를 따라간다. 3권 ‘오뒷세우스’는 지금 스크린에서도 관객을 만나고 있는 트로이아 전쟁 영웅의 이야기다. 왕이 없는 왕국의 왕자 텔레마코스와 왕비 페넬로페에서 시작해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의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겪는 긴 방랑을 그린다.

 

읽어보면 말보다 표정과 몸짓으로 감정을 보여준다. 대사 한마디 없이 인물이 입술을 깨물거나 눈을 부릅뜨고 선 모습만으로 욕망과 공포, 분노를 전달한다. 독자는 설명을 듣는 대신 신화 속 사건의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작가의 오랜 창작 공간이다. 2004년 ‘호메로스가 간다-이우일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트로이아 전쟁과 호메로스의 세계를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이때부터 관련 서적 수십 권을 읽고 그리스를 두 차례 답사했으며 인체 표현을 위해 누드 크로키까지 공부했다. 당시 그는 신화의 내용은 그대로 두되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보는 것이 가장 큰 실험이었다고 밝혔다. ‘노빈손’이 고대 로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노빈손의 좌충우돌 로마 오디세이’의 그림을 맡았고 2011년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릴레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삽화를 그렸다.

 

전작으로 다져진 내공이 들어간 이번 작품은 원전의 큰 줄기를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신과 영웅을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떠받들기보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탐욕을 부리고 실수하는 존재로 내려놓는다. 신들이 벌이는 애증과 권력 다툼에는 인간사가 겹쳐지고 헤라클레스의 고난에서는 오늘날까지 되풀이되는 영웅 서사의 원형이 보인다. 오뒷세우스의 긴 방랑은 결국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려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된다.

 

이우일/비채/1·2권 2만2000원, 3권 2만2500원

내용 감수를 맡은 이준석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소포클레스 전집’을 희랍어 원전에서 옮긴 고전학자. 그는 가장 먼저 작품을 본 독자로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원전에 충실하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그림에 대해서는 지중해 세계를 그리는 가운데 구스타프 클림트와 아르놀트 뵈클린의 색채가 언뜻 나타나고 알폰스 무하의 관능이 스치며 때로는 고대 그리스 도기의 그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림은 신화를 설명하기 위한 삽화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만화가 되고 어떤 페이지에서는 한 폭의 그림이 되면서 장엄함과 우스꽝스러움, 서정과 폭력을 거침없이 오간다. 친절하게 정리된 그리스로마 신화 공부라기보다 오래된 이야기 속을 천천히 걸어보게 하는 그림 여행에 가깝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이 오래된 이야기를 되풀이해 읽어온 까닭을 설명 대신 그림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