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강국 대한민국 보고 계신가요…탄생 150주년 백범 김구의 숨결을 따라가다

광복절 맞아 기념관 찾은 방문객들의 소감
서거 전까지 통일정부 위해 힘쓴 김구의 삶
‘나의 소원’ 책자 속 담긴 백범 김구 선생 초상화와 기념관 내부 동상. 허은선 인턴기자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80여 년 전,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하며 ‘문화 강국의 꿈’을 피력했던 백범 김구 선생. 그가 세상에 태어난 지 올해로 150주년을 맞았다. 15일 광복절을 앞둔 13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는 무더위 속에서도 백범의 발자취를 좇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13일 오후 백범김구기념관을 찾은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허은선 인턴기자

 

이날 오후 기념관에서 만난 김덕기(47)씨 가족은 매년 역사적인 날 기념관을 방문하는 가족 문화로 이번에도 광복절을 앞두고 이곳을 찾았다고 전했다.

 

김씨는 “자녀에게 기념될 만한 곳 중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보라고 했더니 이곳을 정했다”며 “작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봄에는 독립기념관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인 김진서군은 “일본한테 나라를 뺏겼을 때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친일파랑 을사늑약에 맞서 싸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고 독립운동가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탁근우(30)씨는 “김구 선생님이 문화의 힘을 강조하셨는데 100년을 내다보신 것 같다”며 “지금 우리나라가 문화 강국이 돼서 잘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 문지기를 꿈꾼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된 그의 일생

 

지난해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2026년을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해’로 공식 지정했다. 

 

김구의 어릴 적 이름은 창암, 이후 창수였다. 여느 소년과 같이 개구쟁이였던 김구는 양반의 신분 차별에 분노해 과거를 준비했지만 매관매직의 현실을 목격하고 포기했다. 이후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구절을 접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만민평등사상에 이끌린 김구는 1893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해 이듬해 ‘아기접주’로서 활약하다가 패전 후 은신 생활을 했다. 이때 피신했던 곳이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의 집이었다. 1896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처단해 옥고를 치르다 탈옥했다. 구(龜)라는 이름은 이때 인천감리서를 빠져나온 뒤 동지의 제안으로 짓게 됐다.

 

기념관 내 위치한 백범 김구 선생 동상. 허은선 인턴기자

 

이후 교육운동에 힘쓰던 김구는 1907년 항일민족단체 신민회에 가입했다. 하지만 1911년 신민회 105명이 체포되는 민족운동 탄압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때 일제 순사는 김구와 같은 독립운동가를 눈엣가시인 밭의 돌로 비유하며 협박했다. 그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긴 김구는 “오냐, 나는 죽어도 몽우리돌 정신을 품겠고 살아도 몽우리돌의 책무를 다하고 말리라”는 다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 증표로 이름의 거북 구(龜)를 아홉 구(九)로 바꾸고 호를 백범으로 지었다. 백범은 당시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범부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백정과 범부도 자신만큼의 애국심을 지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김구는 창암과 창수에서 구(龜)를 지나, 호를 백범(白凡)으로 칭하고 이름을 구(九)로 바꿨다. 허은선 인턴기자

 

김구는 3·1 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으며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갔다. 안창호를 만나서는 우리나라가 독립해 정부가 생기면 그 뜰을 쓸고 창을 닦는 문지기 역할을 하고 싶다고 청했지만, 경무국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다.

 

사상 분열과 자금난이 겹치며 임시정부는 위기를 맞았다. 김구는 미국·멕시코 동포들에게 도움을 청해 성금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1931년 한인애국단이 만들어졌다. 1호 단원인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가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고, 윤봉길은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행사에 수통형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처단했다.

 

이봉창(좌)과 윤봉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사건으로 일본군이 자신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잡으려 하자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 먼 피난길에 올랐다. 자싱, 하이옌 등 중국 각지를 전전하는 동안 김구는 60만대양(당시 중국 은화 단위·약 350억원)이라는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도 김구는 임시정부 임원으로서 갖은 활동을 펼쳤다. 난징에서 장제스와 회담하고, 한국특무대독립군·한국국민당·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등을 조직하며 세력을 규합했다. 그리고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맡게 됐다. 스스로 청했던 가장 낮은 자리의 ‘문지기’는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른 것이다. 김구는 중국 내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한편, 독립 이후 나라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대한 계획도 세웠다.

 

1945년 8월 15일 김구는 시안(西安)에서 미국 OSS부대와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을 합의하던 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작전은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고, 서울에 진주한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김구는 주석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그해 11월 23일, 27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임시정부 요인들도 11월 23일과 12월 2일, 두 번에 나눠 귀국했다.

 

1948년 4월 2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하는 김구. 허은선 인턴기자

 

그해 12월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남북 사이가 벌어지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자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김구는 1948년 4월 부주석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건너가 김일성·김두봉과 남북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그해 8월과 9월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서며 통일정부 수립은 끝내 무산됐다. 김구는 이후에도 통일과 친일파 청산을 주장했지만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안두희가 쏜 총에 서거했고, 그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됐다.

 

◆ 독립운동가의 숨결이 서린 효창공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김구 탄생 150주년을 맞아 현수막이 걸려 있다. 허은선 인턴기자

 

백범김구기념관은 김구의 독립운동 행적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2002년 10월 개관했다. 1960년 설립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남산공원 동상 건립(1969)에 이어 1998년 기념관 건립 사업을 본격화한 결과다. 개관 당시 백범기념관이었던 이름은 2008년 지금의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이곳은 백범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조명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며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삼의사묘역. 김구의 친필 글씨로 ‘유방백세(流芳百世)’가 새겨져 있다. 허은선 인턴기자

 

기념관을 둘러본 뒤 발길을 옮기면 백범 김구가 안장된 효창공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 묘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묘역, 의열사 등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광복 이후인 1946년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고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마련했다. 삼의사 묘역 아래에는 ‘향기가 백대에 걸쳐 흐른다’는 뜻의 ‘유방백세(流芳百世)’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48년에는 임정 요인들의 유해도 봉안되면서, 효창공원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위인들이 함께 숨 쉬는 장소가 됐다.

 

1947년, 김구가 새문 밖에서 지은 ‘나의 소원’ 중 일부. 허은선 인턴기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김구 선생은 1947년 백범일지 ‘나의 소원’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 평화의 근원이 되는 문화강국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남겼다. 광복절을 맞아 다시 찾은 백범의 유산은 독립을 이룬 과거를 넘어, 우리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