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김부장’에서 장소장 역을 맡은 배우 최범호는 자신의 연기 인생을 ‘견딤의 시간’으로 정의했다. 1983년 연극 무대로 데뷔한 뒤 40여 년간 무대와 안방극장을 오가며 수많은 인물을 연기해 온 그는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동궁’에서도 스님 역으로 시청자를 만났다.
선과 악, 권력자와 서민, 중심과 주변을 넘나들며 오래 연기해 온 그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 버티는 힘”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유엠아이엔터테인먼트에 새 둥지를 틀고 배우로서의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김부장’ 속 장소장은 단순히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인물이다. 군 고위 지휘관으로서 국가의 이익을 우선에 두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김부장과 그의 딸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 미안함을 느낀다.
최범호는 “장소장을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으로 규정하기보다 ‘무엇이 더 유익한가, 무엇이 공동체를 위한가’를 고민하는 인물로 봤다”며 “군복을 입은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 유익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한 아버지의 딸을 이용하는 데서 오는 인간적 미안함을 함께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부장’은 주인공이 자유를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지키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며 “장소장 역시 국가라는 큰 이름 뒤에 숨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인물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장소장의 마지막 선택을 두고도 오래 고민했다. “‘김부장’에서는 죽어야만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의미가 있다”며 “신분을 세탁하려면 죽음을 거쳐야 하는 상황인데, 그 죽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중요했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갈지, 스스로 결단하는 모습으로 보일지 여러 방향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최범호는 오랜 시간 무소속으로 활동하며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소속사가 있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홀로 오디션을 보고 작품을 찾으며 버텼다. 최근 유엠아이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한 것은 그에게도 새로운 변화다.
“여러 사정으로 혼자 활동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번에 좋은 분들을 만나 유엠아이엔터테인먼트에 새롭게 둥지를 틀게 됐습니다.”
다만 그는 소속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곧바로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경계했다. 30년 넘게 홀로 활동해 온 만큼, 소속사와의 관계 역시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설명이다.
“소속사에 들어가면 역할이 커지고 기대도 생기죠. 저 역시 어느 순간 조급해지고, 나도 모르게 요구하게 되는 제 모습을 봤어요. 기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 영역이 아닌 부분까지 마음대로 되기를 바라면 결국 힘들어지더라고요. 저는 요즘 ‘삶은 훈련’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에게 연기는 한때 성공과 인기, 인정으로 향하는 수단이었다. 일이 기대만큼 풀리지 않으면 자존감은 낮아졌고, 작은 배역을 맡았을 때는 불평도 컸다. 스스로를 주류가 아닌 ‘들러리’, ‘아웃사이더’처럼 느끼며 깊이 흔들린 시기도 있었다.
“비교를 하면 제 삶은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고, 그 연약함 때문에 많이 병들기도 했어요. 일이 계속되지 않으니 미래를 위해 들어둔 보험도 매번 해지해야 했고요. 힘들고 속상한 마음을 주변에 화풀이한 적도 있었습니다.”
생각을 바꾼 계기는 아내의 말이었다. 그는 “아내가 ‘생활형 배우로 가족을 먹여 살린 것도 고맙지만, 이제는 배역과 연기 자체에 더 집중해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며 “그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저는 연기 자체보다 연기를 통해 얻고 싶은 것에 더 매달리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그는 ‘배우로 성공하는 법’보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
“연기는 늘 새롭습니다. 인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내가 미처 몰랐던 감정과 삶을 만나게 되거든요. 연기가 주는 새로움에 집중하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최범호는 20대 후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는 말년 병장이나 중사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누군가 30년 뒤 대장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라며 “‘김부장’의 장소장 역시 지난 시간을 지나 만나게 된 선물”이라고 했다.
그는 배우의 시간은 노력만으로 앞당길 수 없다고 믿는다. 배우가 제아무리 준비해도 계절이 곧바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하며 견딜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인기가 있다고 그 사람 안의 꽃이 모두 핀 것은 아니고, 일이 없다고 그 사람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빙산의 일각만 보고 서로를 판단하지만,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경험은 계속 쌓입니다. 언젠가 각자에게 맞는 역할과 계절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고 오래 견디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