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대피 철칙 ‘오카시 모치’ 구마모토 사태선 안 지켜져 인재로 사망 피해 더 키워 대원칙 중요성 다시 새겨야
1980년대 일본 시골 중학교를 배경으로 한 ‘맛있는 급식’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초반부에 지진 발생을 가정해 피난 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훈련에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는 학생에게 교사가 이렇게 혼을 낸다. “오·카·시, 피난의 철칙이다. 초등학교 때 안 배웠나? 소리 내 말해 봐.”
학생은 “오사나이”(주변 사람을 ‘밀지 않는다’), “가케나이”(황급히 ‘뛰지 않는다’), “샤베라나이”(피난 지시 등을 잘 듣기 위해 ‘떠들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이 3원칙의 첫글자를 연결해 만든 말이 ‘오카시’이다. 일본어로 과자라는 뜻이다. 어린아이들이 방재 의식을 쉽고 재미있게 익힐 수 있도록 만든 조어이다.
유태영 도쿄 특파원
자료를 찾아보니 이후 ‘모도라나이’(건물이나 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와 ‘지카즈카나이’(위험한 곳에 ‘다가가지 않는다’)가 더해져 ‘오카시 모치’로 확장됐다고 한다. 일본어 모치는 떡을 뜻한다.
지난달 말 구마모토현 지진 현장 취재를 다녀온 뒤로 드라마 속 이 장면이 종종 떠오른다. 길 건너 가드레일까지 처참하게 뭉개질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나 7명이 숨지고 26명이 다친 이온몰 구마모토 사고는 ‘천재’(天災)에서 시작했지만, 어린이들도 익히 아는 피난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은 탓에 일어난 ‘인재’(人災)였을 가능성이 점점 짙어져서다.
당시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약 3000명의 쇼핑객과 직원은 지진 발생 직후 야외 주차장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하지만 일부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조리용 LP가스 누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로 변을 당했다. 화재, 지진 등이 일어나 피난했을 때에는 2차 재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는 원칙이 무너진 셈이었다. 지진이 잦아 학교 사물함에 방재 헬멧을 비치해 두고 수시로 피난 훈련과 보호자 인계 훈련을 하는 일본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특히 이곳에 입점해 있던 잡화점 ‘하비타’는 대피한 직원에게 ‘매장으로 돌아가 매상을 금고에 넣으라’고 한 사실이 드러났다. 회사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22세의 여성 직원 오타케 구루미가 폭발 사고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일본이 아직 현금 사용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사회라고는 하지만, 하루 매출의 일부를 지키려다 직원 목숨을 위험에 빠뜨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뒤늦게 사죄하는 사측을 향해 오타케의 모친은 “우리 딸은 이제 못 돌아온다고요”라며 절규했다.
이온몰 측도 우왕좌왕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간 “규정상 (재해 발생 후에는) 관내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명해 왔으나, 집·차량 열쇠나 지갑, 휴대전화 등을 놓고 온 사람들 요구에 재입장을 허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온몰은 지난 11일 이 같은 자체 조사 결과를 밝히며 “대피 후 규정, 매뉴얼, 교육, 운용 체계가 없었던 점이 현장에 판단을 맡기는 결과로 이어졌다”며 “대피 후 재입장을 막기 위해 직원들이 근무 중 귀중품 등을 휴대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꾸겠다”고 했다.
지진 현장을 취재하며 느낀 또 한 가지는 72시간 골든타임이 비단 구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로가 갈라져 계단처럼 단차가 생기고, 목조 주택들이 기왓장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져 내린 우키시, 히카와초 등과 달리 구마모토 시내 쪽은 비교적 피해가 작은 편이었는데도 편의점에 생수, 보리차, 녹차 등이 동나 있었다. 식재료가 없어 문을 닫은 음식점도 여럿이었다. 긴 줄이 늘어선 주유소는 판매량을 20ℓ로 제한하기도 했다. 주변 도로, 철도가 파손되면서 구마모토가 한때 고립된 섬처럼 변해 생긴 일이었다.
진원지 근처 마트나 편의점은 내부 정돈을 못 끝내 문조차 열지 못한 곳이 많았다. 최소 사흘 치 비상식량과 물, 구급약, 손전등 등을 챙긴 비상가방을 평소 준비해 두라고 하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도쿄 집으로 돌아와 비상용 생수가 얼마나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아이들에겐 유치원, 학교에서 어떤 피난 요령을 배웠는지 확인했다. 아무리 익숙한 원칙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게 바로 구마모토 지진 현장에서 확인한 대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