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순백의 얼음산에서 칼바람에 맞서 걸어가던 엘사는 마침내 자신의 운명과 맞서기로 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능력을 감춘 채 살아야 했던 지난날을 떠나보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겠다는 선언. ‘렛 잇 고’다. 완만하게 시작한 노래는 세 번에 걸쳐 상승한다. 마지막 각성의 순간 무대는 엘사가 만들어낸 얼음 결정체로 뒤덮인다. 숨겨진 왕녀에서 제 힘을 드러낸 여왕으로서 얼음 궁전에 올라선 엘사가 순식간에 아이스 드레스를 입고 겨울 여왕으로 변신한다. 표를 끊을 때부터 기다리던 장면을 만난 객석에서 환호성과 갈채가 솟아오른다. 1막을 닫는 3분 46초, 이 작품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 완성되는 장면이다.
뮤지컬 ‘겨울왕국’이 한국 초연의 막을 올렸다. 2013년 개봉한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뒤 2018년 3월 브로드웨이 세인트 제임스 극장에서 뮤지컬로 새로 태어난 작품이다.
주인공은 눈덮인 스칸디나비아반도 어디엔가 있었을 법한 아렌델 왕궁의 두 자매다. 첫째 엘사는 눈과 얼음을 다루는 강력한 마법을 지녔지만 두려움과 고립 속에 그 힘을 숨기며 자랐다. 활기차고 명랑한 둘째 안나는 외롭게 자라면서 바깥세상과, 그리고 사랑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언니와의 교감을 간절히 바란다. 성인이 된 엘사가 여왕으로 즉위하는 날 동생의 성급한 결혼 선언에 당황한 나머지 마법이 폭발하고, 아렌델은 한여름에 끝나지 않는 겨울에 갇힌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북쪽 산으로 올라간 언니를 되찾고 왕국을 구하기 위해 안나가 위험한 여정에 나선다. 그리고 정령족에게서 자란 산골 사나이 크리스토프와 그의 순록 스벤, 엘사의 마법과 안나의 따뜻한 마음에서 태어난 눈사람 올라프가 여정에 합류한다.
치열한 오디션 끝에 한국 초대 엘사 역은 정선아·정유지·민경아가 맡았다. 안나 역은 박진주·홍금비·최지혜, 크리스토프 역은 차윤해·신재범, 한스 역은 김원빈·황건하, 올라프 역은 정원영·한규정·이창호가 출연한다.
안나 역시 밝기만 한 인물이 아니다. 무대의 안나는 오랜 단절이 남긴 외로움과 결핍을 안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관식에서 처음 만난 이웃나라 왕자 한스에게 곧바로 마음을 연다. 얼음 궁전을 찾아간 안나가 언니와 주고받는 ‘렛 잇 고’ 리프라이즈와 ‘잃고 싶지 않아’는 작품의 주제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노래다.
‘알라딘’에서 지니가 객석의 웃음 단추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눈사람 올라프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천진하면서도 사려 깊은 울라프는 웃음을 주면서도 사랑과 헌신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또 다른 ‘신스틸러’는 순록 스벤이다. ‘라이온 킹’ 이래 무대에서 관객을 만난 동물 연기 가운데 실제 동물에 가장 가깝다. ‘라이온 킹’에서 마스크와 퍼펫의 공동 디자인을 맡았던 마이클 커리가 스벤을 실제 순록 크기로 제작해 배우의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만들었는데 절묘하다.
무대는 막이 오르는 첫 장면부터 디즈니 뮤지컬 명가의 솜씨가 드러난다. 근래 대형 뮤지컬들이 발광다이오드(LED) 화면 위에 영상을 띄우는 방식에 기대는 사이, ‘겨울왕국’은 아날로그 무대 미술을 뼈대로 삼고 그 위에 조명과 프로젝션을 투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공을 들인 흔적은 도처에 있다. 무대와 의상에 쓰인 원단은 미국·영국·노르웨이·스웨덴·한국·일본·인도 등 17개국에서 수급했다. 비즈 작업과 니팅·크로세·니들 포인트 같은 수공예가 디지털 프린팅, 카본 파이버 3차원 프린팅과 나란히 동원됐다. 아이스 드레스에 들어간 비즈와 스톤은 1만개가 넘고, 비즈 작업에만 한 사람 기준 42일이 걸렸다. 왕과 왕비가 착용하는 대형 버클은 서기 900년쯤 실제 바이킹이 사용했던 장신구를 모델로 제작했다. 실제 모피는 한 점도 쓰지 않고 30여종의 인조 모피로 대체했다.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한 부분에까지 아렌델 왕국의 문장인 크로커스 꽃을 새겨 넣은 집요함이 빛난다.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작품이 관객에 전하는 메시지는 “진정한 사랑은 얼음도 녹인다”로 압축된다. 얼어붙은 왕국을 되돌린 것은 마법을 푸는 주문도, 운명의 상대와 입맞춤도 아니라 서로를 향해 몸을 던지는 두 자매의 선택이다.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내년 3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