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해 먹고 살래?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갈지 묻는 질문이다. 지금은 선택할 수 있는 직업도 많은데다 가치관도 변해, 아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퍽 다채롭다. 이런 일은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세상에 나가 활동하는 길은 관직에 나가는 것이 유일했다. 관직에 나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으나, 과거시험 가운데서도 문과를 가장 선호했다. 그 이유는 대사간 이식(李植)이 인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청요직의 선발에 있어 문사만을 취하므로 한번 그 길을 통해 들어가 지켜나가면서 실패만 하지 않으면 한림·주서에서 공경에 이르는 것이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일과 같습니다.”『인조실록』 인조 5년 4월 4일
이식이 언급한 ‘문사’는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다. 문과가 아니더라도 관직에 나갈 수는 있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알리거나, 유공자의 후손인 경우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사서 편찬을 담당하는 사관과 간언을 맡은 언관을 거쳐 임금과 더불어 국정을 운영하고 결정할 수 있는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에 이르는 사다리는 오직 문과 합격자에게만 주어졌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아이들은 말문이 트여 말귀를 알아들을 때 즈음이면 집안 어른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0대에는 유능한 스승을 찾아 시와 산문 그리고 경서를 배우며, 과거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성균관에서도 성적 우수자에게 생원진사시나 문과의 1차 시험을 건너뛰는 특혜를 주었다. 이러한 특혜는 17세기 왜란과 호란으로 무너진 교육체계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성균관에서 치르는 시험에서 탁월한 성적을 받을 경우 바로 문과 합격증을 주는 엄청난 특혜가 늘었다. 게다가 후기로 갈수록 다양한 명목의 비정기 문과 시험이 자주 시행되었다.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이들은 각자의 처지와 능력에 따라 다양한 합격 전략을 세워 도전했다. 조선시대 일기에 시험 관련 기록이 보이는데, 선비들은 20년 이상 시험을 위해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경상도 예안 유생 김령은 선대가 거듭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특히 그의 부친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도 15세에 도산서원에 입학하여 수학할 정도로 총명했고, 문장도 능했다. 일기 속 기록에 따르면, 그는 27세에서 36세까지 10년 동안 진사시에 6번 응시해, 1차 시험에 3번이나 통과했다. 하지만 최종시험에서 낙방했다. 문과 시험 역시 같은 기간 동안 수차례 응시를 반복했다. 그러나 1612년 비정기 문과에 합격했다. 10년의 노력 끝에 김령은 문사로서 출세의 사다리에 첫발을 내디뎠다.
문장도 잘 쓰고, 경서에도 해박한 응시자는 수도 없이 많았던 터라,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문과의 벽을 넘으려면 전략이 필요했다. 충청도 홍주 유생 조세환은 어려서부터 숙부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총명함은 19세 나이로 생원시에 20등이라는 높은 순위로 합격하며 증명되었다. 일찍 생원이 되어 전도가 유망했으나, 조세환은 병자호란 등 당시 정세에 실망해 초야에 묻혀 지냈다. 그러다가 30대에 조모의 권유로 과거 공부를 다시 시작해, 10여 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문과에 응시했다. 하지만 1차시를 통과하고서도 번번이 2차시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는 전략을 바꿔, 성균관 유생에게 주어지는 특별 시험을 통해 문과의 벽을 넘고자 했다. 가솔을 이끌고 아예 서울로 올라온 조세환은 성균관에서 열린 과거시험에 응시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로써 문과 1차시를 면제받게 되자, 그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2년 동안 오로지 2차시 경서 공부에 매달렸다. 노력에 전략이 보태져, 그는 1657년 합격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다소 늦은 나이에 출세의 사다리에 올랐으나, 조세환은 차근히 올라갔다.
충청도 덕산 유생 조극선은 17세부터 29세까지 생원진사시를 12회나 치렀다. 그동안 1차 시험에 2번 통과했으나, 끝내 결실을 얻지 못했다. 문과도 많이 응시했다. 그는 22세부터 20년간 17회나 문과에 응시했다. 문과 1차시에는 무려 7번이나 통과했으나, 2차시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조극선은 31세에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으나, 이후로도 거듭 문과에 응시했다. 관직에 나간 뒤 응시한 문과만도 10회에 달했다. 그는 관직 생활과 과거 준비를 병행할 수 없다고 여겨 사직하고 고향에서 시험 준비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40세가 넘도록 문과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조극선만이 아니었다. 문과의 문턱을 넘는 자만이 출세의 사다리에 오를 수 있었다. 관직에 있건 없건 그토록 문과에 응시했던 것은 이식이 말했듯 문과 합격이 곧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21)
원창애 경상대 전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