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온 국민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빠져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가 세상의 편견을 하나씩 넘어서는 이야기에 함께 울고 웃었다.
그해 가을, 드라마 밖에선 또 다른 ‘우영우’를 만날 수 있었다. 골프채를 든 현실의 우영우였다.
“저도 같이 유명해질 수 있게 돼서 기분이 좋아요.”
‘골프계 우영우’라는 별명이 어떠냐고 묻자 수줍게 웃던 프로골퍼 이승민(29)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드라마 속 우영우의 이야기는 16부작으로 끝났지만, 현실의 ‘우영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갔다. 비장애 선수들과 겨뤄 투어 출전권을 따냈고, 세계 곳곳의 골프장을 돌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난 5월, 마침내 마지막 하나를 채웠다.
US 어댑티브 오픈, 호주 올 어빌리티 챔피언십에 이어 G4D 오픈까지. 장애인 골프 3대 메이저를 모두 손에 넣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이었다.
‘우영우’ 이름 석자는 서서히 흐려졌지만, ‘이승민’ 석자는 더 또렷해졌다.
공이 ‘슝’ 날아가는 게 좋았다
이승민을 처음 만난 건 2022년 늦가을, 다른 매체에 있을 때였다. 서울 압구정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봄날의 햇살 같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골프를 왜 시작했느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이 뜻밖이었다.
“공이 푸른 잔디 위로 슝~ 날아가는 게 신기했어요.”
거창한 꿈도, 승부욕도 아니었다. 그저 공이 날아가는 게 좋았다.
이승민은 두 살 무렵 자폐성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또래와 어울리는 일은 늘 그에게 벽이었다. 여럿이 몸을 부딪치는 운동은 더 그랬다. 처음 시작한 아이스하키도 그래서 오래가지 못했다.
골프는 달랐다. 소란한 세상에서 한 발 비켜서 그저 나와 공 그리고 저 앞의 홀에만 집중하면 됐다.
골프는 조금씩 그를 바꿔놓았다. 말수가 늘고 낯선 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세상과 어울리는 법을 익혀갔다.
엄마부터 박은빈까지…“고마워요”
골프가 다정하게 품어주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해병대 출신 캐디 윤슬기씨와 연습하다 도망친 게 수십 번. 그래도 매번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곁을 지킨 건 어머니 박지애씨였다. 아들이 태어난 뒤로 ‘박지애’라는 이름 대신 ‘승민이 엄마’로 살았다.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낫겠지,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텼어요.”
그렇게 하루씩 쌓은 시간이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자 이승민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오랜 시간 곁을 지켜준 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자폐인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서툴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그날 만난 이승민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우영우를 연기한 배우 박은빈에게도 SNS로 직접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답장은 아직이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듯 휴대폰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205명과 ‘밥그릇 싸움’…꿈꾸던 정규직
이승민의 골프엔 늘 ‘최초’가 따라다녔다. 2017년 자폐성 발달장애 선수 최초로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정회원이 됐다. 하지만 정회원 자격이 곧 정규 투어 출전을 보장하는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초청 선수로 대회에 나서던 그는 지난해 마침내 스스로 문을 열었다. 아시아 남자 프로골프의 주요 무대인 차이나투어 퀄리파잉 스쿨에서 비장애 선수 205명과 겨뤄 13위로 정규 시드를 손에 넣었다. 이승민은 그렇게 얻은 자격을 “꿈에 그리던 정규직”이라고 불렀다.
올해 5월엔 또 하나의 기록을 썼다. 영국 웨일스 G4D 오픈에서 정상에 오르며 장애인 골프 3대 메이저 석권을 완성했다. ‘골프계 우영우’로 불리던 이승민의 이름 앞에 ‘커리어 그랜드슬래머’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다음 목표는 ‘태극마크’다. 골프는 아직 패럴림픽 정식 종목이 아니지만 2032년 브리즈번 대회에서 채택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정식 종목이 된다면 대한민국 대표로 메달을 따는 게 그의 다음 꿈이다.
이승민의 드라마는 ‘ing’
돌아보면 이승민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웃음이 터지는 시트콤이었다가 눈물겨운 휴먼 드라마였다가 짝사랑 같은 로맨스이기도 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이 있는가 하면 이따금 조금 심심하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4년 전, 그는 우영우를 연기한 배우를 언젠가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이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도 아직 방영되지 않은 다음 회차인지 모른다.
분명한 건 하나다. 이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승민은 오는 24일 SK텔레콤 어댑티브 오픈 2026 with SK하이닉스 대회에 나선다. 발달장애 선수들이 프로들과 한 조를 이뤄 필드를 도는 대회다. 세계 정상에 선 그는 이제 막 걸음을 뗀 후배들 곁에 선다.
공이 ‘슝’ 날아가는 게 좋았던 소년. 그의 이야기는 오늘도 다음 홀에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