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을 지나 여의도를 건너면 조선시대 삼진(三津)의 하나인 양화진(楊花津, 버들꽃나루)이 나온다. 한강의 하류, 여의도를 지나 선유도 쪽으로 예전부터 버드나무가 늘어서서 봄이면 버들꽃이 한창인 풍취가 아름다운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화진은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했는데, 양화도(楊花渡)를 지나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공암(孔巖)이 나온다. 이곳도 일찍부터 나루터가 있던 곳이라 ‘용비어천가’(1447) 제14장에서는 남한강을 설명하는 곳에서 ‘공암(孔巖)’이라는 지명에 대해서 ‘孔巖 구무바·회津’이라는 한글 주석과 함께 주변 지명을 상세히 기록해 둔 바 있다. 해당 구문을 가져와 보면 다음과 같다. “남한강은… 서울[京城] 남쪽에 이르러 한강나루[漢江渡]가 되고 서쪽으로 가서 노들나루[露渡]가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용산강(龍山江)이 된다. 금천현(衿天縣)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현(陽川縣) 북쪽에 가서 공암(孔巖) 즉 [구무바·회]나루가 된다….” 그리고 같은 책 제49장에서는 ‘양천(陽川)’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하면서 “양천은 본래 고구려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다. 신라 때 이름을 ‘공암(孔巖)’이라고 고쳐 율진군(栗津郡)에 속하는 현으로 했다. 고려 현종 때 수주(樹州)의 관내에 속하게 했고, 충선왕은 양천현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두었다. 본조(즉 조선)에서는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공암(孔巖)의 고구려 지명 ‘齊次波衣縣’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있어 왔는데, ‘공암(孔巖)’의 ‘巖’과의 관련성으로 인해 ‘波衣’가 우리말 ‘바위’를 한자로 쓴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孔[구멍 공]’과 ‘齊次’의 연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서울대 명예교수 임홍빈 교수가 2008년에 쓴 논문에서 이 지명의 본래 명칭은 ‘乳巖(유암, 젖바위)’이었는데 훗날 글자의 탈각과 비속한 명칭을 회피하려는 이유로 ‘孔巖(공암) 구무바․회津’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옳다 그르다 답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서 학계에서는 사실상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 훨씬 우세한 편이다. 하지만 정선(鄭敾) 기념관에 있는 ‘양화진도(楊花鎭圖)’나 간송미술관에 있는 ‘경교명승첩’의 하나인 ‘공암층탑(孔巖層塔)’과 같은 그림을 보면 ‘孔巖(공암)’이 본래 ‘乳巖(유암)’으로 쓰고 ‘젖바위’로 읽었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1800년 무렵에 양천 현감을 지냈던 정선(鄭敾)은 자주 공암(孔巖)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에 올라 한강을 끼고 바라다보이는 한양성과 반대편의 양화진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림들에 그려진 ‘孔巖(공암)’은 본래 구멍이 나 있는 바위 두 개가 짝으로 있었다. 고구려의 지명 ‘제차파의(齊次巴衣)’가 신라 때 공암(孔巖)으로 바뀌었다는 대목은 엄밀히 말하자면 신라가 고구려식 지명을 꺼려서 ‘乳巖’을 ‘孔巖’으로 바꾸었다고 읽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乳巖(유암)’이라는 지명 한자를 뜻으로 읽는 전통의 입장에서는 고구려나 신라나 큰 차이가 없이 ‘젖바위’로 읽었을 것인데 신라의 어느 시기 ‘공암(孔巖)’으로 정착하면서 고구려 때부터의 독법과 단절이 된 것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조선 후기 정선의 ‘양화진도’가 그려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공암(孔巖)을 이루던 두 바위 중 하나는 이미 사라지게 되었고 나머지 하나도 어느새 땅 이름 몇 곳과 공원 이름에만 ‘공암’이라는 이름으로 남고 실제 바위도 땅 이름 이야기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김양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