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형사재판소(ICC)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에서 집단학살(제노사이드)·반인도적 범죄·전쟁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치된 상설법원이다. 종종 국제사법재판소(ICJ)와 혼동한다. ICJ는 영토 등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유엔 소속 기관이다. ICC는 개인의 죄과에 대한 형사책임을 물어 범죄재발 방지를 목적으로 하고 유엔에서도 독립된 조직이다. 한국 등 125개국이 회원국이고, 자국민 처벌 가능성이 큰 미국, 중국, 러시아, 북한, 이스라엘 등은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본격적인 ICC 형해화(形骸化) 작업에 나섰다. 지난달 마크 루비오 국무장관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해체 캠페인’ 선언에 이어 이번에 아카네 도모코(赤根智子) 재판소장 등 2명을 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ICC의 (재판)관할권에 동의하지 않은 국가의 당국자들을 조사, 체포, 구금, 기소하려는 ICC 노력에 관여해왔다”는 이유다. 이에 따라 ICC의 판사·검찰관 13명이 제재 대상이 됐다.
ICC에 대해 역대 미국 정부는 공화당·민주당 할 것 없이 회의적이었지만 트럼프 정권처럼 노골적인 행보는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은 ICC가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한 미군을 수사 대상으로 삼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벌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ICC는 회원국에서 벌어진 비회원국 인사의 범죄 행위도 처벌할 수 있어 미국의 입장은 일방적이다.
미국은 최근 유엔의 인권 수장인 볼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의 연임 표결에서 북한, 러시아 등과 반대표를 던졌다. 한국은 기권했다. 인권의 등불이었던 미국이 스스로 등대를 부수는 착잡한 상황이다. ICC는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를 막는 인권의 마지막 보루다. ICC가 해체되면 전후 질서의 토대가 돼온 법치주의는 근본부터 흔들리고, 중소국(中小國)이 대국의 힘에 굴복하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강화될 것이다. 미국은 한국 등 동맹국의 ICC 탈퇴를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ICC 지지를 표명하고 국제법에 근거한 국제질서의 유지를 옹호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