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인공지능(AI)이 보고서를 요약하거나 이메일을 작성하는 수준을 넘어 제조 현장의 ‘동료’로 들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전담 정보기술(IT) 조직이 AI 시스템을 개발해 현업에 내려보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최근에는 생산·품질·연구개발(R&D)·공급망관리(SCM) 담당자가 직접 업무상 문제를 찾아 AI 모델이나 에이전트를 만들어 해결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한국앤컴퍼니그룹을 비롯해 현대자동차그룹,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퓨처엠 등 주요 제조기업이 일제히 현업 중심의 AI 전환(AX)에 속도를 내는 이유다.
한국앤컴퍼니그룹은 최근 직원들이 직접 AI를 활용해 업무 문제를 해결하는 체계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 6월 서울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에서 열린 ‘AI Vibe Coding 해커톤 2026’에는 30개 팀, 80명의 임직원이 참여했다. 개발 전문인력만 참여한 행사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를 이용해 자신들의 업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대상을 받은 ‘가시나무’ 팀은 지도 기반 시각화와 AI 분석을 결합해 공급망 위험을 파악하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타이어 상품전략 수립이나 글로벌 공장 품질 리스크 탐지 등 생산·품질·SCM과 직접 연결되는 과제도 나왔다.
KAIST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과 진행한 AI 경진대회에서도 현장 데이터가 중심에 섰다. 임직원과 KAIST 대학원생들이 한 팀을 이뤄 6주 동안 실제 데이터를 활용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대상을 받은 프로젝트는 배터리 셀 데이터로 충전 상태(SOC)를 예측하는 모델이다. 단순 모델 개발에서 끝내지 않고 향후 배터리관리시스템(BMS) 양산 적용까지 고려한 파이프라인을 구축했다. 시험기간 단축과 비전 검사, 타이어 마모 추정, 품질 이슈 예측, 제동성능 예측, SCM 특화 AI 에이전트 등도 수상 과제에 포함됐다.
AI를 일상 업무로 확산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2024년 자체 생성형 AI 서비스 ‘챗HK(ChatHK)’와 번역 서비스 ‘컴HK(CommHK)’를 도입했다. 챗HK는 출시 1년 만에 누적 메시지 25만건, 월간 활성 사용자 비율 50%를 기록했다. 최근에는 구글 클라우드의 ‘제미나이 엔터프라이즈’까지 도입해 AI 에이전트와 직원이 함께 일하는 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AI 적용 범위도 넓다. 한국타이어는 타이어 패턴을 학습해 디자인을 생성하는 AI 모델을 활용하고 있으며 스마트타이어 센서 데이터를 이용한 마모·마찰 알고리즘, AI 기반 주행시험 등을 개발하고 있다. 챗HK를 활용해 글로벌 고객의 타이어 성능 리뷰를 분석하는 VOC 분석 시스템도 운영한다.
현대차그룹 역시 AI의 주도권을 현업으로 옮기고 있다.
현대차·기아 일반직과 연구직의 약 80%가 사내 생성형 AI 플랫폼 ‘H Chat Pro’를 활용하고 있다. 직원들은 보안 환경 안에서 챗GPT와 제미나이, 클로드 등을 업무 특성에 맞게 선택해 문서 작성뿐 아니라 데이터 분석과 코드 개발 등에 사용한다.
현장에서 나타난 효과도 수치로 확인되고 있다.
연구개발 분야에서는 ‘충돌안전 AI 어시스턴트’를 도입했다. 엔지니어가 과거 충돌시험 자료를 일일이 뒤지는 대신 AI가 유사 사례의 시험 조건과 차량 구조, 상해 발생 원인, 개선 방안 등을 함께 분석한다.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관련 사례 탐색과 분석자료 검토 시간이 약 90% 줄었다. 엔지니어가 검색에 쓰던 시간을 설계 개선과 시험 전략 수립에 투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공장에서는 카메라와 비전 AI가 차량식별번호(VIN)를 판독해 실제 생산 차량과 시스템상의 차량 정보를 실시간 대조한다. 회사는 이 같은 ‘AI 자동화 인식 서비스’를 통해 연간 52억4000만원의 비용 절감 효과도 거뒀다고 밝혔다.
특히 제조 특화 플랫폼 ‘E-FOREST: POLARIS’를 구축해 품질·생산·설비·물류 담당 엔지니어들이 직접 AI 에이전트를 만들 수 있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AI 개발을 IT 조직만의 영역에서 떼어내 현장의 경험과 노하우 자체를 AI 에이전트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LG전자는 제품 개발과 생산 단계에서 AI가 엔지니어의 판단을 보조하는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대표 사례가 웹 기반 AI 플랫폼 ‘Eng.AI’다.
과거 시제품을 제작하기 전 제품 품질을 예측하려면 한 번에 약 3~8시간의 시뮬레이션 작업이 필요했다. LG전자가 개발한 AI 기술을 이용하면 별도의 시뮬레이션 없이 3분 안에 예측할 수 있다.
품질 예측 시간이 최대 99% 단축된 셈이다. AI 학습 시간도 기존 딥러닝 방식보다 95% 이상 줄였고 메모리 사용량은 10분의 1 수준으로 낮추면서 정확도는 15% 이상 높였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생산설비 관리에도 생성형 AI가 들어갔다.
작업자가 “오후 2시 A설비 이상 떨림”이라고 말하면 시스템이 이를 기록하고, 이후 유사한 이상 현상과 과거 조치 방법을 물으면 AI가 관련 사례를 찾아 제시하는 방식이다.
비전 AI는 설비 이상과 제품 불량뿐 아니라 안전모나 작업조끼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작업자까지 식별한다.
삼성전자는 한발 더 나아가 2030년까지 국내외 생산거점을 ‘AI 자율공장’으로 전환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자재 입고부터 생산과 출하까지 모든 공정에 디지털 트윈 기반 시뮬레이션을 적용하고 품질·생산·물류 분야에 AI 에이전트를 투입한다는 구상이다.
단순히 공장 자동화율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AI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문제 발생 가능성을 예측한 뒤 필요한 대응까지 제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환경안전 분야에도 AI를 적용해 현장의 위험요인을 사전에 감지한다.
사무 현장도 동시에 바뀌고 있다.
삼성전자 DX부문은 지난 6월 임직원들이 챗GPT·제미나이·클로드를 모두 업무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이에 앞서 2500여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실제 업무 활용 가능성을 검증했다.
삼성은 R&D와 생산, 마케팅, 지원 등 전체 업무 밸류체인에 AI를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배터리 소재 업계에서도 AI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은 지난달 전사 AX 로드맵을 공개하면서 2028년 상반기까지 원료 수급부터 제품 생산, 고객사 협업에 이르는 전 과정에 AI를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목표도 구체적이다.
피지컬 AI를 제조공정에 적용해 생산성을 30% 높이고, AI를 활용한 기술 트렌드 분석과 설계·가상검증을 통해 제품 개발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한다는 목표다. 품질 문제 대응 속도도 현재보다 두 배 높이기로 했다.
제조업의 AX 경쟁은 이제 생성형 AI 서비스 도입 여부만으로는 차별화하기 어려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를 사내에 개방하는 기업은 빠르게 늘고 있다. 다음 경쟁은 직원이 AI를 이용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를 생산성과 비용 절감, 품질 개선으로 연결하느냐에 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앤컴퍼니그룹이 해커톤과 KAIST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현업 직원에게 AI 개발 경험을 넓히고, 현대차가 공장 엔지니어에게 직접 AI 에이전트를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LG전자와 삼성전자는 AI가 제품 개발과 생산 공정을 직접 분석하는 수준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고, 포스코퓨처엠은 아예 생산성과 개발기간 등 정량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결국 제조업 AI 경쟁의 승부처는 ‘가장 뛰어난 AI 모델’을 보유했는지가 아니라 생산라인과 연구실, 품질·물류 현장에서 AI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사람과 함께 일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