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세기의 이혼소송’ 쟁점 중 하나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이 검찰 강제수사로 실체가 규명될지 주목된다. 노 전 대통령의 딸인 노 관장 측이 법정에 증거로 제출했던 ‘선경 300억’ 메모로 세간에 알려진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첫 압수수색에 나섰다. 해당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국고 환수까지 이어질 가능성에도 관심이 모인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부장검사 소정수)는 이날 노 전 대통령 배우자이자 노 관장의 모친 김옥숙 여사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 등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영장을 집행 중이다. 영장에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과 조세포탈 혐의 등이 적시된 것으로 전해졌다. 압수수색 대상에는 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재헌 주중한국대사가 각각 이사장과 상임이사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재단과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노 전 대통령 일가에 차명계좌를 제공했다고 지목된 당시 청와대 비서관들의 자택도 포함됐다고 한다.
이번 압수수색은 5·18 재단 등이 2024년 노 전 대통령 일가와 최 회장 등을 범죄수익은닉과 조세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뒤 이뤄진 첫 강제수사다. 앞서 노 관장 측은 2023년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모친 김 여사가 보관하던 1991년 선경건설(SK에코플랜트 전신) 명의 약속어음과 선경 300억이라고 적힌 메모를 증거로 제출했다. 노 관장 측은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300억원을 건네는 대신 최 회장의 선친이 담보로 선경건설 명의 어음을 전달했고, 이 돈이 태평양증권 인수나 선경그룹의 경영활동 등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건넨 300억원을 SK그룹 재산 형성 과정에서 노 관장의 기여도로 인정해달라는 취지였다. 최 회장 측은 비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2심은 1심 판단을 뒤집고 비자금 300억원이 SK그룹에 흘러 들어갔다고 인정, 재산 분할 액수를 1조3808억원으로 크게 늘렸다. 이후 대법원은 해당 비자금에 대해 ‘뇌물로 보인다’고만 했을 뿐 존재 여부에 대해선 판단을 내놓지 않았다. 대법원은 비자금이 선경그룹에 전달됐다 하더라도 “선량한 풍속과 사회질서에 반하고 반사회성·반윤리성·반도덕성이 현저해 법의 보호영역 밖에 있다”며 “재산 분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지난달 파기환송심 선고에서 결국 비자금 300억원이 노 관장 기여분에서 제외됐다.
검찰은 2024년 고발장을 접수한 이후 김 여사 측에 자금 흐름에 대한 소명을 요구하고 노 전 대통령 일가의 금융계좌 자료를 확보해 자금 흐름을 쫓아왔다. 이날 압수수색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 뇌물인지 등을 명확히 밝히는 한편,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범죄수익 은닉 정황을 입증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선 노 전 대통령과 최종현 SK 선대 회장이 모두 사망한 데다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 자료도 들여다봐야 해 실체 규명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평가도 나온다. 범죄수익 은닉죄의 공소시효는 7년이라 최근까지 은닉 행위가 확인돼야 한다. 1991년 비자금 전달부터 현재까지 자금 흐름 전반을 파악해 은닉 여부 등을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995년 태평양증권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최종현 선대 회장을 조사했지만, 자금 출처를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까지 연결하진 못했다. 이 300억원은 노 전 대통령이 뇌물로 선고받은 추징금 2628억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해당 비자금의 실체와 뇌물인지 여부 등이 밝혀진다면 국고로 환수할 길은 열려 있다. 전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범죄수익은닉규제법 개정안은 당사자가 사망해도 불법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독립몰수제’를 골자로 한다. 개정안은 특히 내란 등 헌정질서 파괴 범죄와 이에 근거해 획득한 직무상 지위를 이용한 뇌물·횡령·배임 범죄를 몰수 대상에 적시하고 있다. 법안은 공포 후 1년 뒤 시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