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년 전 한양이 오늘의 용산에 묻다 [김세희의 역사ON]

과거는 현재를 관통합니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수천·수백 년 전 벌어진 사건과 문제는 오늘날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됩니다. 특히 사회·정치·경제 분야에서 빚어지는 고질적 병폐는 시대를 달리해 반복되고 있습니다.

 

‘김세희의 역사ON’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등 사료에 기록된 사건·인물·제도를 오늘의 현안과 연결해 살펴보고 논평하고자 합니다. 과거를 성찰의 거울로 삼아 오늘의 현실을 이해할 단서를 찾겠습니다. 

 

서울 용산구 용산공원 부지 뒤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 모습. 최상수 기자

“여러 해 동안 편안하게 살던 집을 하루아침에 헐어버리면 그 원망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1481년(조선 성종 12년) 1월 22일 열린 경연에서는 궁궐 주변 산맥과 산등성이에 지어진 민가의 철거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 배경에는 한양의 주택난이 있었다. 도성으로 인구가 몰리면서 집터가 부족해지자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도로를 침범하거나 건축 금지 구역에 들어선 집도 생겨났다. 일부 백성은 주택 건축이 금지된 궁궐 주변 산맥과 산등성이에까지 집을 지었다. 

 

당시 조정은 민가 199채와 가묘 31동을 철거 대상으로 지정했다. 궁궐 인근 산맥에 지어진 집은 철거를 5개월간 유예하되, 풍수상 궁궐의 기운을 누른다고 여겨진 ‘임압가옥’은 즉시 철거하도록 했다. 집을 철거한 자리에는 과실수·소나무·잣나무와 잡목을 심어 공조와 한성부가 관리하도록 명했다. 

 

시독관 이창신을 비롯한 중신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산맥을 보존하고 풍수 질서를 지킨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살아온 백성의 집을 일률적으로 허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정창손 등도 궁궐을 직접 압도하는 집이 아니라면 모두 철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거들었다. 결국 성종은 “백성의 근심과 원망을 알고 있으니 천천히 헤아리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545년이 흐른 지금, 정부와 서울시는 방향만 뒤집힌 비슷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조선 조정이 백성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으려 했다면, 오늘날 정부는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한 땅 일부에 집을 짓겠다고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용산공원 내 일부 부지에 청년·신혼부부 등을 위한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서울시는 용산공원의 일부라도 아파트를 짓는 용도로 전환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며 맞서고 있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20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조선 시대와 정책 방향은 반대지만 질문은 놀랍도록 닮았다. 결국 집이 부족한 도시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어줄 것인가이다. 

 

청년·신혼부부의 주거난은 결코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될 수는 없다. 법 개정과 오염 조사·정화, 교통대책까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2020년 주택공급지로 발표된 캠프킴 부지는 6년이 지나도록 정화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용산공원 개발이 당장의 주택난을 해소할 대책으로서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인 이유다. 정작 정책 수혜자인 청년들이 언제 입주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국민적 공감대 없이 밀어붙인다면 또 다른 갈등과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주택정책의 답은 지도 위 빈 땅이 아니라 그 도시를 살아갈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 정부가 먼저 헤아릴 것은 어디에 몇 채를 지을지가 아니라, 시민이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