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꽃별 밤엔 진짜 별 즐기는 당포성
마리골드·백일홍·버들마편초 활짝
광대·아내 애틋한 전설 깃든 재인폭포
주상절리 수직절벽 사이 폭포 장관
출렁다리 오르면 베개용암 절경 ‘아찔’
꽃길 걷는다. 화사한 황금빛과 주황빛으로 넘실대는 이름도 예쁜 마리골드 꽃밭을. 그 너머 버들마편초 여린 보랏빛 꽃송이는 바람에 살랑거리고. 목화도 서둘러 몽글몽글 하얀 솜을 피어 내니 보기만 해도 마음은 한없이 포근하다. 현무암 수직 절벽을 끼고 푸른 물 느릿느릿 흐르는 연천 당포성 정원으로 들어서자 여름은 현재진행형이지만 가슴은 서둘러 가을이다.
◆별 볼 일 있는 당포성 가보셨나요
입추에 말복까지 지나자 맹위를 떨치던 한여름도 한풀 꺾인다. 아침저녁 찬바람 솔솔 부니 에어컨 없이도 살 것 같다. 경기 최북단 연천은 이런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실감하기 좋은 곳이다.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당포성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이곳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 당포나루를 지키기 위해 쌓은 강안 평지성. 고구려는 신라 군대가 나루터를 건너 북상하는 것을 감시하고 차단하기 위해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호로고루, 은대리성과 함께 고구려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던 3대 성곽 중 하나로 꼽힌다.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 샛강이 만나 이룬 약 13m 높이의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 위에 있다. 삼면이 수직 절벽인 천혜의 요새이기에 방어가 취약한 동쪽 입구에만 흙과 돌을 함께 다져 성벽을 쌓았다. 전체 둘레는 약 450m, 핵심 방어선인 동성벽은 길이 50m, 높이 약 6m에 달한다.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지금은 성벽 위 나 홀로 선 팽나무가 푸른 하늘과 어우러지는 예쁜 풍경 덕분에 높은 인기를 누린다. 또 빛 공해가 적어 은하수를 감상하는 국내 대표 별 보기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요즘은 화사한 꽃들이 만발해 여심을 자극한다. 당포성 진입로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노랑과 주황색 마리골드 꽃밭이 반긴다.
줄기가 곧게 뻗으며 40~90㎝ 자라는 천수국(아프리칸 마리골드)으로 크고 둥근 꽃송이를 겹겹이 피워냈다. 15~40㎝로 낮게 자라는 프렌치 마리골드는 만수국으로 불리는데 꽃잎 가장자리에 붉은빛이나 갈색 띠가 둘러져 화단 앞줄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마리골드가 천수국과 만수국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봄부터 가을 첫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오랫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특히 늦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수록 황금빛과 주황빛이 더욱 짙어지며 고풍스러운 성곽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마리골드 사이로 길게 뻗은 줄기 끝에 자잘한 보라색이 뭉쳐 피는 꽃은 버들마편초. 학명은 버베나로 뿌리가 겨울을 나고 이듬해 다시 꽃을 피우는 다년생이라 ‘숙근 버베나’로도 불린다. 6월부터 피기 시작해 9~10월까지 개화 기간이 길어 마리골드, 백일홍 등과 함께 정원을 오래도록 수놓는다. 꽃말이 모두 예쁘다. 마리골드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버들마편초는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이다. 주황빛 마리골드와 여린 보랏빛 버들마편초가 함께 흔들리는 풍경 앞에 서면, 두 꽃의 다정하고 예쁜 꽃말이 겹쳐 마음까지 한결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정원 한쪽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목화밭도 펼쳐진다. 목화솜은 보통 9~10월에나 만들어지는데 하얀 솜들이 초록잎 위로 몽글몽글 솟아오른 걸 보니 성격이 참 급한 목화인가 보다. 하얀 솜만 목화꽃으로 아는 이가 많지만, 사실 목화는 따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개화 첫날은 부드러운 크림빛이나 연한 노란색을 띠다가, 수정이 되고 며칠이 지나면 수줍은 분홍빛에서 진한 자줏빛으로 물들며 떨어진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초록빛 타원형 열매 ‘다래’가 맺히고, 늦가을 껍질이 갈라지면 하얀 목화솜이 부풀어 오른다. 목화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이니 가을날 어머니 손잡고 걷기 좋은 곳이다.
산책로에선 임진강 주상절리 절벽 뷰가 액자처럼 담기는 포토존과 당포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초승달 포토존도 만난다. 또 정원에는 ‘별 볼 일 있는 당포성’ 글자와 별 모양 조형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이유가 있다. 사실 당포성은 주변에 민가와 인공조명이 적어 밤이면 은하수가 쏟아지는 수도권 대표 별 보기 명소로, 매년 가을이면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곁들인 당포성 별빛 축제가 열린다.
정원 산책의 종착지는 동측 성벽 위에 홀로 선 팽나무. 계단을 오르는 인물을 로앵글로 올려다보듯 찍으면 하늘에 둥실 뜬 듯한 입체적인 나무와 사람이 어우러지는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노을이 질 때 나무와 그 아래 선 사람을 까만 실루엣으로 담는 감성 촬영이 인기다. 또 밤에 은하수나 별궤적 사진을 찍을 때 팽나무가 기준점이 된다.
◆슬픈 전설 깃든 재인폭포
당포성에서 차로 5분 거리의 숭의전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전대 왕조인 고려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399년(정종 1년) 왕명에 따라 고려 태조를 비롯해 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까지 고려 8왕의 위패가 이곳에 봉안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제기됐다. 1425년(세종 7년) 조선의 종묘에서는 5왕만 제사를 지내는데 고려조의 사당에서 8왕이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와 결국 태조·현종·문종·원종 4왕만 봉향하는 것으로 축소됐다. 고려 4왕과 더불어 정몽주 등 고려조의 충신 16명도 이름을 올렸고 지금도 봄과 가을에 두 차례 제를 올린다.
경기 연천, 포천과 강원 철원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도 유명하다. 약 50만∼12만년 전 화산 폭발로 생긴 현무암 주상절리 협곡 지대가 국내에선 유일하게 강과 하천에 펼쳐진다. 이런 독보적인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7월 세계지질공원 공식 인증을 받았다. 모두 26곳에 흩어져 있는데 대표적인 명소가 재인폭포다. 아찔한 협곡을 감상하며 산책길을 10여분 걷자 협곡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출렁다리 너머로 장쾌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재인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는 원래 이곳에서 350m나 떨어진 한탄강 본류에 있었다. 물줄기가 오랜 시간 동안 현무암을 계속 깎아내면서 폭포가 뒤로 밀려났고, 산책로 주변 깊은 협곡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니 자연의 신비는 대단하다.
출렁다리 한가운데 서자 18m 낙차의 폭포와 이를 병풍처럼 둘러싼 높이 25m 안팎의 수직 주상절리 절벽이 어우러지는 풍경에 탄성이 터진다. 협곡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면 폭포를 눈앞에서 즐길 수 있다. 밑에서 보니 폭포의 규모가 두 배는 더 커 보일 정도로 웅장하게 느껴진다. 폭포 아래 물가에는 소용돌이가 지층을 파내며 만든 동굴도 발달해 있다. 또 폭포수가 떨어지는 자리의 수심은 약 5m로, 맑은 날에는 비취색에 가까운 물빛이 신비를 더한다.
멋진 풍경과 달리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 고을에 줄타기 재주가 남다른 광대(재인)가 아름답고 정절 깊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원님이 아내의 미모에 눈이 멀어 그녀를 차지하려는 흑심을 품었고, 남편에게 폭포 위에 걸린 외줄을 타보라고 명령했다. 남편이 허공에서 재주를 넘는 사이 원님의 사주를 받은 관리가 몰래 줄을 끊었고, 남편은 그만 폭포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뒀다. 남편이 죽자 원님은 아내에게 수청을 강요했지만 아내는 순종하는 척 방에 들어가 원님의 코를 깨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절을 지켰다. 마을 사람들은 숨진 재인의 넋을 기려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불렀고, 아내가 코를 깨문 마을이란 뜻에서 고을 이름을 ‘고문리’라 불렀다.
◆자연이 만든 신비 베개용암·좌상바위
재인폭포 인근 아우라지 베개용암도 지질공원을 대표하는 명소다. ‘아우라지’는 한탄강 본류와 포천에서 흘러드는 영평천이 ‘Y자’ 모양으로 만나는 합류점을 말한다. 베개용암은 수십만 년 전 신생대 제4기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뜨거운 용암이 옛 한탄강 물줄기를 타고 흐르다 영평천의 차가운 물과 마주치는 순간 급격히 식으며 만들어졌다. 이때 둥글둥글한 덩어리가 겹겹이 쌓이면서 마치 베개를 포개 놓은 듯한 모양이 만들어져 베개용암이란 이름을 얻었다. 통상 베개용암은 깊은 바닷속 해저 화산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지형으로 꼽힌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길이 300m 출렁다리에 서면 베개용암을 더 아찔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2층 전망대에 올라서면 풍경이 한층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베개용암에서 멀지 않은 신답리 강변에는 높이 60m의 거대한 바위산, 좌상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중생대 백악기 말, 약 9000만년 전 화산 활동 당시 마그마가 분출하던 화구 주변에서 굳은 현무암 덩어리다. 바위 표면 곳곳에 박힌 하얀 점은 마그마가 뿜어져 나올 때 가스가 빠져나간 구멍을 광물이 채우며 남긴 흔적이고, 세로로 길게 파인 줄무늬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인 풍화의 자국이다. 궁평리 마을 왼쪽에 서 있어 좌상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독특한 모습 때문에 오래전부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