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발레만 봐야 한다면…백조의 호수, 18마리 백조가 그린 한 폭의 그림

푸른 달빛이 아스라이 깔린 호숫가에 로트바르트가 나타난다. 날개를 펄럭이며 무대를 누비는 악의 화신이다. 밤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로서 자신을 한껏 과시한 그가 물러나면 비로소 하얀 백조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백조의 호수’를 그토록 특별한 발레로 만들어주는 백조 군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수많은 발레 작품 중 단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백조의 호수’는 유력한 후보다. 한 무용수가 오데트와 오딜을 함께 연기하는 백조와 흑조의 대칭, 서정적인 호숫가와 화려한 궁정의 대비, 감정의 진폭이 큰 차이콥스키의 교향적 음악이 한 작품 안에 결합돼 있다. 그 정점은 1막 2장의 호숫가다. 서사로 보면 왕자가 흑조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로트바르트와 맞서다 파국으로 치닫는 2막이 극적이다. 그러나 발레 무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심상(心象)의 아름다움에서는 호숫가 장면이 앞선다.

 

‘백조의 호수’ 무대에 오른 백조와 흑조.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그 중심에 백조 군무가 있다. 무용수들의 팔 동작인 폴 드 브라가 날개의 움직임과 깃털의 질감을 빚어낸다. 팔꿈치와 손목을 부드럽게 굽힌 팔은 때로 백조의 목을 떠올리게 한다. 무용수들은 조각처럼 대형을 짜고 철새 떼의 편대처럼 긴 사선을 그린다. 한 다리를 뒤로 길게 뻗은 아라베스크로 멈춰 서는 순간 푸른 조명 아래 강렬한 이미지가 완성된다.

 

지난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선보인 유니버설발레단은 이번에도 전통의 ‘칼군무’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1막에서 18명, 2막에서 24명의 무용수가 만들어낸 백조 군무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초연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백조의 호수’의 운명을 바꾼 것도 이 호숫가 장면이었다. 1894년 차이콥스키 추모 공연에서 레프 이바노프가 새로 안무한 호숫가 장면이 호평받으면서 이듬해 마린스키극장의 전막 개작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백조의 호수’의 뼈대가 된 마리우스 프티파·이바노프 판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세 마리 큰 백조의 춤과 네 마리 작은 백조의 춤에서도 앙상블의 정교함이 살아났다. 특히 네 무용수가 팔을 교차해 서로 손을 잡은 채 발동작을 맞춰야 하는 작은 백조의 춤에서 유니버설발레단 특유의 정확한 호흡이 돋보였다. 세 무용수가 호흡을 맞추는 파 드 트루아도 일품이었다.

 

‘백조의 호수’ 호숫가 장면에서 오데트를 연기중인 전여진이 지그프리드 이승민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전여진은 이번 공연에서 긴 팔과 다리로 한없이 서정적인 오데트를 그려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이 작품이 지닌 군무의 아름다움은 결국 백조 중의 백조, 오데트의 춤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지난 18일 무대에 선 오데트는 전여진이었다. 발레를 위해 타고난 듯한 긴 팔과 다리로 떨리는 날갯짓과 발끝을 연기하고, 뒤로 길게 뻗어 아치를 그리는 아라베스크로 한없이 서정적인 오데트를 빚어냈다. 큰 키와 긴 다리에도 도약은 가벼웠다. 궁정을 박차고 나온 지그프리드를 만나 사랑을 속삭이며 그의 팔에 안겨 뛰어오르는 장면에서는 중력을 거스르는 우아함이 살아났다.

 

전여진은 대극장 객석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주역의 아우라로 자신의 오데트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다만 흑조 오딜에서는 아직 오데트만큼 강렬한 개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전여진은 서른둘에 처음 주역을 맡은 늦깎이 무용수다. 여섯 살에 발레를 시작해 선화예술중·고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2012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그러나 주역까지는 십수 년이 걸렸다. 중간에 발레단을 떠났다가 2018년 돌아왔고, 첫 전막 주역은 지난해 4월 ‘지젤’이었다. 이어 7월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오딜을 맡았다. 지난해 12월 한국발레협회상 신인 발레리나상을 받았고 올해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지난해 ‘지젤’ 데뷔를 앞두고 만났을 때 그는 긴 무명의 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발레단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나는 무조건 무대에 서는 사람이고 주역은 당연히 될 수 있지’라는 오만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군무로 무대에 서다가 잘리기도 하고, 뒷줄로 밀리기도 하고….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게 내 문제였구나.’”

 

그는 주역이 된다는 것이 혼자 잘 추는 일은 아니라고도 했다. 중심에 서면서 동시에 다른 무용수들과 어우러져야 하는데 그 경계를 찾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데트가 바로 그 자리다. 여러 백조들 한가운데 서서 그들과 하나이면서 홀로여야 한다. 오랫동안 군무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온 전여진에게 오데트는 그래서 더욱 특별한 배역이다.

 

‘백조의 호수’ 2막을 장식하는 화려한 궁중 무도회 장면.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 2막은 화려한 무대와 의상, 각국의 캐릭터 댄스로 풍성했다. 다른 회차의 주역급 무용수들이 조연까지 맡는 두꺼운 출연진이 장면의 밀도를 높였다. 어릿광대 주형준은 능청스러운 연기와 탄력 있는 움직임으로 로트바르트와 함께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신예 이승민의 지그프리드는 후반으로 갈수록 활짝 피어났다. 특히 흑조의 정체를 깨닫고 호수로 돌아와 로트바르트와 맞서는 장면에서는 큰 키와 또렷한 인상을 살려 왕자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줬다. 차세대 주자로서 잠재력을 확인시킨 무대였다. 

 

2막 궁정 무도회에서 흑조 오딜로 변신한 전여진(왼쪽)이 지그프리드 이승민과 춤추고 있다. 오른쪽은 두 사람을 지켜보는 로트바르트.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마린스키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 전민철과 홍향기가 짝을 이룬 회차는 완벽한 춤과 연기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번 무대의 성취가 그 한 커플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1회 공연을 여섯 커플이 나눠 맡을 만큼 두꺼워진 주역층을 보여줬다. 레퍼토리의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신예 양성을 통한 세대교체로 생명력을 키워가는 명문 발레단의 저력이 돋보인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