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다더니 잔금 앞두고 막혔네요.”
집을 알아보던 직장인 박모(39) 씨는 은행에서 “대출 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계약까지 마쳤다. 잔금일이 다가와 다시 은행을 찾으니 얘기가 달라졌다. 한도가 줄었거나, 접수가 이미 끝났다는 답이 돌아온 것이다.
올해 주택담보대출 시장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총량을 강하게 조이는 동안, 은행들은 한도를 줄였다 늘리길 반복했고 접수 창구도 닫았다 열었다를 되풀이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을 비롯한 지방은행과 인터넷은행 등 17개 은행의 공개 조치를 집계한 결과, 올해 들어 가계대출 취급 기준이 바뀐 횟수는 73차례에 달했다.
집 계약은 잔금까지 수개월을 내다보고 자금 계획을 짜야 하는데, 대출 기준은 며칠 사이에도 달라졌다. 같은 소득, 같은 담보 조건이라도 신청 시점에 따라 대출 가능 여부가 갈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1.5%로 묶었다가 넉 달 만에 3%로
가계빚이 다시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가계신용 잔액은 2019조8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2000조원을 넘어섰다. 석 달 사이 25조9000억원이 늘었다.
이 중 가계대출은 1891조3000억원으로 24조9000억원 증가했는데, 1분기 증가액(12조9000억원)의 거의 두 배다.
금융당국은 지난 4월 가계부채 관리 강도를 확 높였다. 올해 관리대상 가계대출 증가율을 1.5% 수준으로 묶고, 다주택자·임대사업자가 보유한 수도권·규제지역 아파트 담보대출은 원칙적으로 만기 연장을 제한하기로 했다. 임차인이 있는 경우 등 불가피한 사정에는 예외를 뒀다.
넉 달 만에 그 목표가 다시 바뀌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3일 올해 가계대출 총량 증가율 관리 목표를 1.5%에서 3% 수준으로 올렸다. 주택 공급을 늘리고 청년·실수요자의 자금 조달 부담을 덜기 위한 조치다.
전면적으로 규제를 푼 건 아니다. 금융위는 투기성 대출 수요를 억제하는 기조는 유지하되 늘어난 대출 여력을 주택공급과 청년 주거안정, 실수요자 지원에 쓰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막았다 열었다 다시 막았다…17개 은행, 73차례
문제는 빠듯한 총량 목표를 맞추는 과정에서 은행의 대출 취급 조건이 수시로 흔들렸다는 점이다. 집계 결과 올해 들어 17개 은행이 가계대출 취급 기준을 공개적으로 바꾼 횟수는 총 73차례였다. 신한·하나·우리은행이 각각 10차례, KB국민은행이 9차례, NH농협은행이 8차례 기준을 손봤다.
방식도 다양했다. 주담대 한도를 낮추거나 특정 상품 판매를 중단했고, 대출모집인이나 비대면을 통한 접수를 멈추기도 했다.
주담대 한도를 산정할 때 소액임차보증금 차감분을 보완해주는 모기지신용보험(MCI)·모기지신용보증(MCG) 가입을 제한한 은행도 잇따랐다. 이 보험·보증 가입이 막히면 실제 받을 수 있는 주담대 한도가 그만큼 줄어드는 효과가 난다.
같은 은행 안에서도 문이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신한은행은 대출모집인을 통한 가계대출 접수를 중단했다가 다시 열었지만, 배정된 한도가 빠르게 소진되면서 며칠 뒤 재차 접수를 막았다.
KB국민은행도 지난 6월부터 주담대 갈아타기와 타행 대출 상환을 조건으로 한 대출을 제한하고, MCI·MCG 가입을 막았다. 지난달에는 주택구입 목적 주담대 한도를 지역과 관계없이 최대 3억원으로 낮췄다.
◆총량은 두 배로 늘었는데…일반 주담대 빗장은 여전
정부가 총량 목표를 3%로 올렸다고 해서 대출 창구가 곧바로 넓어진 건 아니다. 당국은 지난 19일부터 은행별 추가 한도를 어떻게 나눌지 논의에 들어갔다.
전체 금융권에서 새로 생기는 대출 여력은 약 26조~30조원으로 추정되지만, 은행마다 올해 실적이 다른 만큼 추가 한도가 똑같이 배정되지는 않는다. 은행별 목표치는 아직 확정 전이다.
추가 여력의 용처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주비·중도금·잔금대출 같은 집단대출과 청년·중저신용자·실수요자 대출에 우선 공급한다는 게 당국 방침이다.
실제로 집단대출 쪽에서는 숨통이 트이는 모습이다. 서울 서초구 ‘디에이치 방배’ 잔금대출을 놓고 5대 은행이 한도를 기존 총 5000억원에서 1조5500억원으로, 이틀 사이 세 배 넘게 늘렸다.
반면 KB국민은행의 주택구입 목적 주담대 3억원 상한 같은 은행별 자체 규제는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계약은 수개월, 대출 조건은 며칠 만에 바뀐다
가장 곤란한 건 이미 집을 계약한 실수요자다. 주택 매매나 임대차 계약은 계약금을 낸 뒤 중도금과 잔금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자녀 학교, 직장 출퇴근, 기존 집의 매도·퇴거 일정까지 얽혀 있어 잔금 날짜를 마음대로 조정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은행 대출이 상담 당시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고 해서 몇 달 뒤 실행까지 보장되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사이 은행의 연간 총량이 차거나 상품별 한도가 소진되면 접수가 제한될 수 있다.
은행 입장에서도 연간 목표를 넘기지 않으려면 월별·분기별로 공급량을 조절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집단대출이나 신용대출이 예상보다 빠르게 늘면, 다른 대출의 한도를 줄여 전체 증가액을 맞추게 된다.
그 결과 소득과 신용도, 담보가 그대로여도 신청 시점에 따라 대출 가능 여부가 달라지는 일이 생긴다. 가계부채를 관리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크지 않다. 문제는 그 과정의 예측 가능성이다.
정부가 올해 총량 목표를 1.5%에서 3%로 다시 올렸지만, 개별 은행이 앞으로 얼마만큼 어떤 대출을 공급할지는 여전히 차주가 미리 알기 어렵다.
수개월 뒤 잔금까지 책임져야 하는 실수요자에게 필요한 건 어느 날 갑자기 열리는 대출 창구가 아닌, 계약을 맺는 순간부터 잔금일까지 자금을 얼마나 조달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