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삼킨 거리…1999년 동두천 보산동의 잔인했던 여름 [사진기자 이제원의 30년 된 외장하드]

Kodak 필름 한 롤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며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카메라에 표시된 필름 카운터가 25 정도가 되면 고민이 시작됐다. 필름을 새걸로 갈아야 하나 남은 거로 찍어도 될까? 제한된 서른여섯 번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신중함과 긴장감, 설렘은 지금의 디지털카메라 시대에는 느낄 수가 없는 감정이다.

 

사진기자는 본인이 취재했던 사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관한다. 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사진의 중요도를 떠나 보관을 많이 하는 사진기자이다. 역사의 중요했던 순간도 있었고, 상황이 기억도 없는 시답지 않은 사진도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담은 기념사진도 있고 취재와 출장 중에 보이는 나의 모습도 있다.

 

아주 먼 옛날의 모습은 아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열어본 나의 외장하드를 독자들과 같이 꺼내보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1999년 8월 2일 폭우가 내려 거리가 침수된 경기 동두천시 보산동에서 미군과 경찰들이 침수된 차량을 밀어서 이동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1999년 8월 2일, 경기 동두천시 보산동.

 

거리는 사라지고 누런 강물이 도시를 차지했다. 흙탕물은 승용차를 삼키고 차체 중간까지 차올랐다. 물살에 멈춰 선 흰색 승용차 뒤로 미군과 경찰관들이 달라붙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몸을 앞으로 한껏 숙인 채 두 손으로 차를 밀어낸다. 빗줄기는 그칠 기미가 없고, 우산을 쓴 시민들은 물바다가 된 거리를 망연자실 바라본다.

 

사진은 1990년대의 동두천 시내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알록달록한 차양을 두른 ‘평남상회’, 파란색 바탕에 큼지막한 영문으로 적힌 ‘CASEY CLOTHING STORE’. 미군 부대와 맞닿아 있던 동두천 보산동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상점도, 간판도, 도로도 폭우로 만들어진 거센 황톳물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해 여름 경기도 북부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7월 말부터 이어진 집중호우로 연천과 파주, 동두천 등 시내와 논, 밭 곳곳이 물에 잠겼다. 취재 당일인 8월 2일까지 동두천에 내린 비는 716㎜. 동두천 신천에는 주민 대피령까지 내려졌다. 이날 밤 집계된 이재민은 중부지방에서 1만 8000명을 넘어섰고 주택 6000여 채가 침수됐다. 여기에 제7호 태풍 ‘올가’까지 북상하면서 인근 학교에 마련된 대피소 생활을 이어가던 주민들은 무섭게 퍼붓는 비를 속절없이 바라보며 불안 속에서 또 밤을 맞아야 했다. 이재민들은 정부와 지자체를 향해 부실한 하천 정비와 배수 시스템 개선을 촉구했다.

 

경기북부 주민들에게 물난리는 낯선 일이 아니었다. 1996년 7월 집중호우에 이어 1998년 여름에도 큰 수해를 입었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다시 물이 마을과 삶터를 덮쳤다. 당시 언론은 1999년 수해를 두고 1996년과 1998년에 이은 경기북부의 세 번째 대형 수해라고 기록했다. 주민들은 매년 여름철 집중호우 때마다 신천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반복되면서, "예견된 인재"라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필름 속에 멈춰 있는 것은 거대한 재난의 한가운데를 버티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산 아래 물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민, 황톳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동차를 밀어내는 미군과 경찰관들. 누군가는 자신의 가게와 집을 걱정했고, 누군가는 처음 보는 이의 차를 힘을 모아 함께 밀었다.

 

27년이 흐른 지금 사진을 다시 꺼내본다. 빛바랜 필름에 기록된 동두천 보산동, 허리 가까이 차오른 황톳물과 온몸으로 차를 밀던 사람들의 모습은 말한다. 무섭고 잔인했던 그해 여름, 물은 도시를 삼켰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밀고 끌며 그 어려운 시간을 버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