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다는 ‘악인’이었다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미국 애리조나주(州) 피닉스의 경찰서장을 지낸 캐롤 쿨리가 지난 2023년 5월29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58년 피닉스 경찰서에 들어가 20년간 일하고 1978년 은퇴한 쿨리는 결코 유명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쿨리의 타계 후 미 언론 매체 여럿이 부고 기사를 내보낸 것은 쿨리 본인 때문이 아니고 그가 1963년 3월 성범죄 혐의로 체포한 피의자 에르네스토 미란다(1941~1976)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미란다 원칙’의 주인공으로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이른바 ‘미란다 사건’ 50주년이던 2013년 전직 경찰관 캐롤 쿨리(왼쪽)가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경찰박물관에서 성폭행 피의자 에르네스토 미란다 체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란다는 18세 여자를 납치한 뒤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미란다를 붙잡은 쿨리는 자백을 받아냈고, 미란다 스스로 이를 종이에 적게끔 했다. 1·2심 법원은 미란다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국선변호인이 “미란다가 경찰에 체포될 당시 형사 사건 피의자로서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에 관해 제대로 고지(告知)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법정 공방은 새 국면을 맞았다. 1966년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5 대 4 의견으로 미란다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깼다. 다수의견에 가담한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미란다에겐 경찰 심문 도중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고, 진술 거부권도 여러 면에서 효과적으로 보장되지 못했다”는 논리를 들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선 ‘범죄 피의자에게 변호인 선임권 등 기본적 권리를 반드시 고지해야 한다’는 미란다 원칙이 정립됐다. 쿨리를 비롯한 경찰관들은 반발했다. “그런 식이면 앞으로 수사가 불가능해진다”며 “흉악범들이 처벌도 안 받고 풀려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란다는 성범죄에 한해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별건 혐의가 드러나 결국 징역을 살았다. 교도소에서 나온 뒤에도 개과천선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미란다는 1976년 2월 피닉스 시내 어느 술집에서 다른 손님과 말다툼을 하다가 흉기에 찔려 30대 중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대법원은 25일 “음주운전 단속 과정에서 ‘채혈을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면 채혈로 얻은 혈중 알코올 농도 감정 결과를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난 2022년 2월 대전의 한 도로에서 음주운전을 한 혐의로 A씨가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경찰은 A씨 본인도 동의한 혈액 채취를 통해 혈중 알코올 농도 0.129%란 수치를 확보했다. 2심은 A씨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지만, 상고심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음주운전 단속 과정에서 ‘채혈을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면 채혈로 얻은 혈중 알코올 농도 감정 결과를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시하며 A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대법관들의 판단을 존중하나, 이 같은 판례가 상습적 음주운전자들에 의해 악용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미란다 원칙은 옳지만 미란다 본인은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