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조금씩은 나쁘고, 저마다 사정 있듯이… 따뜻하다가도 낯선 할매이웃들의 탄생

장편 ‘찌니주의보’ 출간한 정지아

“평균 78세 구례 가상의 마을로 온 레즈비언 커플의 정착 소동
실제 구례에 사는 작가 “살다보면 진짜 빌런 별로 없어
여기서 부딪치며 서울살이 가시 다 뽑혀 나간 듯”
“할매들은 제 머릿속에 무수히 있어요. 그냥 꺼내오면 됐어요.”

 

소설가 정지아(61)가 새 장편 ‘찌니주의보’(창비)를 쓰며 가장 쉽게 불러낸 이들은 구례의 할매들이었다. 1965년 구례에서 ‘빨치산의 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때 서울로 이사했다가 2011년 노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거리낌 없이 ‘훅’ 들어오는 동네 할매들의 간섭이 괴로웠다. 이제는 여든 넘은 할매들을 ‘언니’라 부른다. 미우나 고우나 끊어낼 수 없는 이웃으로 만나고, 부딪치고, 음식을 나누며 지낸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다. 구례를 창작의 원천 삼아 사는 그를 지난 18일 이번 작품의 실제 무대인 구례에서 만났다.

18일 전남광주 구례에서 만난 소설가 정지아는 “내게 소설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며 “소설은 그 결과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서둘러 쓰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규희 기자

‘찌니주의보’의 무대는 평균 연령 78세인 구례의 가상 마을 수평마을. 서울 출신 30대 여성 혜진과 성진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 평균 연령은 단숨에 72세로 낮아진다. 둘을 구분하고 이름을 외우기도 벅찬 할매들은 두 사람을 통틀어 ‘찌니들’이라 부른다. 찌니들은 자가용으로 할매들을 장에 태워다주고 약을 타다 준다. 할매들은 반찬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서로의 생활에 조금씩 스며들던 어느 날, 두 사람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찌니들이 말이여. 레지랴 레지.” 마을이 발칵 뒤집힌다. 쫓아내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라며 감싸는 이들도 있다. 할매들은 찌니들에게 상처를 줬다가도 대문 앞에 반찬통을 걸어놓고, 성희롱 섞인 질문을 던지고는 호박전을 건넨다. 서울내기들과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 노인들이 한 마을에서 좌충우돌 우정을 쌓는다. 소설 속 한 인물의 말대로 “이 동네, 진짜 스펙터클하다!”

 

작가를 애먹인 것은 찌니들이었다. 할매들은 작가가 수십 년간 보고 겪은 사람들을 형상화하면 됐지만, 찌니들은 한 세대가 어린 데다 성적 지향도 다르다. 지난해 연재 도중 “찌니들 묘사 때문에 망하겠다 싶어서” 쓰기를 멈칫하기도 했다. 

소설 ‘찌니주의보’. 창비 제공

다행히 도움받을 곳은 많았다. 정지아에게는 사제관계로 출발해 친구가 된 이들이 30대부터 50대까지 많다. 그중 레즈비언 친구들도 있다. 평소 성적 지향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레즈 친구들’을 불러 하나하나 물었다. 배우고 쓰고 고쳤다. 

 

그래도 그는 “찌니들 캐릭터가 할매들에 비해 평면적”이라며 “여전히 불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없는 삶의 직감을 억지로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는 “찌니들 삶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노인들에 비해 밋밋할 수밖에 없다”며 “그걸 그대로 보여주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선악으로 말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밉살스러운 윤 선생도 삶의 내막과 상처를 알고 나면 마냥 미워하기 어렵다. 마을 사람들도 서로 좋아서만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앙숙이라도 결정적인 순간 상대가 어려움에 빠지면 손발을 걷어붙이고 돕는다. 좁은 공동체에서 이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간단히 끊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미운 정과 고운 정이 함께 쌓인다. 

 

작가가 구례에서 배운 것도 그러한 관계의 속성이다. ‘차단’은 쉽고 ‘손절’할 사람이 천지이며 나를 빼고 모두 ‘빌런’처럼 보이는 서울의 인간관계와는 달랐다. 정 작가 역시 서울에서는 그야말로 싫은 것투성이여서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살았다. 구례에 와서는 가시가 하나둘 뽑혀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는 “사람과 부딪치며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작가에게 좋은 훈련”이었다며 결과적으로 “훨씬 다양한 인간을 작품에 그려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정지아 작가. 창비 제공

사람을 제대로 겪으면 누구도 한 가지 얼굴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선은 40만 부가 팔린 전작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 속 빨치산 아버지의 삼일장에서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는 말로 형상화됐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 시선이 한 사람에서 마을 전체로, 사흘에서 한 계절로 확장됐다. 목차에서 집약되듯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고, 누구나 조금씩은 나쁘며,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찌니주의보’에는 ‘빌런’이 없다. 정 작가는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영화라면 극적 구성을 위해 확실한 빌런이 한 명 있어야겠지만, 그런 영화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마치 실제 인생의 모습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며 “하지만 인생에 그렇게 대놓고 빌런은 잘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구례의 할매들은 머리에서 “그냥 꺼내오면” 됐지만, 다음 소설은 그렇게 쓸 수 없다. 일본 오사카 야쿠자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재일조선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미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어놓았지만, 그곳의 공기도 냄새도 모르니 묘사가 나오지 않더라”고 했다. 

 

집필 시점은 101세 어머니의 시간에 달려 있다. 정 작가는 옆집에 사는 어머니의 식사를 하루 두 번 챙기며 곁을 지키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사카에 석 달쯤 살며 소설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 다음 작품으로는 고려인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조바심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는 “엄마가 오래 사시면 오래 사셔서 좋은 일이고, 엄마가 수년 사이 돌아가시면 소설 쓸 시간이 빨리 오니 좋은 일”이라고 여유 있게 말했다. 그러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저, 기본적으로 소설 많이 쓰는 사람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