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품 만들고, 물류까지 챙긴다”…유통가 ‘AI 전쟁’

유통업계의 인공지능(AI) 경쟁이 ‘챗GPT로 보고서 쓰기’ 단계를 넘어섰다. 신제품 아이디어를 찾고 소비자 반응을 미리 분석하는가 하면 물류 배차와 영업지원, 법률 검토까지 AI가 맡기 시작했다. 일부 기업에서는 AI에 사번을 부여하고 실제 직원처럼 성과까지 관리한다.

 

남양유업 제공

남양유업도 전사 업무에 AI를 접목한다. 구매·생산·물류 등 반복 업무가 많은 현장에서 AI가 실제로 얼마나 시간을 줄일 수 있는지 검증한 뒤 적용 범위를 넓힌다는 계획이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남양유업은 한글과컴퓨터와 전사 AI 활용 확대 및 업무 프로세스 혁신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양사는 지난 25일 경기 성남시 판교 한컴타워에서 협약식을 열고 AX(AI Transformation) 전략 수립을 비롯해 부서별 AI 적용 과제 발굴, 기존 업무 시스템과 AI 솔루션 연계, 도입 이후 업무 효율 개선 효과 분석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첫 적용 대상은 구매·생산·물류 등 현업 부서다.

 

남양유업은 각 부서의 업무 과정을 분석한 뒤 한컴의 ‘에이전틱 OS’를 단계적으로 시범 적용한다. 에이전틱 OS는 여러 AI 에이전트를 하나의 환경에서 연결하고 관리하는 플랫폼이다.

 

자료 작성이나 데이터 분석처럼 사람이 반복해 처리해왔던 업무 가운데 자동화할 수 있는 영역을 우선 찾는다. 시범 운영 과정에서 실제 업무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도 측정한다.

 

기존 기업들의 생성형 AI 도입이 직원 개인의 문서 작성이나 검색을 돕는 데 집중됐다면, AI를 회사 업무 시스템 안으로 넣어 일정한 업무를 직접 처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업계에서 한발 더 나간 곳은 동원그룹이다.

 

동원은 올해 동원산업·동원F&B·동원홈푸드·동원시스템즈·동원로엑스·동원건설산업 등 6개 계열사에 AI 에이전트를 각각 한 명씩 배치했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AI 에이전트에 실제 ‘사번’을 부여하고 상·하반기 기수제로 운영한다. 분기별 성과평가와 부서 이동, 역할 종료 개념도 적용한다.

 

AI 사원이 담당하는 일은 영업지원과 안전관리, 물류 배차, 건설 견적 자동화 등이다. 6개 AI 에이전트를 통해 줄일 수 있는 업무시간만 연간 약 2만4000시간으로 회사 측은 추산하고 있다.

 

동원은 이미 2024년 자체 생성형 AI 플랫폼 ‘동원GPT’를 도입했다. 보고서 작성과 데이터 분석, 인사·총무 정보 검색 등을 맡기면서 당시 연간 약 15만시간의 업무시간 절감 효과를 기대했다.

 

AI 활용 범위는 공장으로도 들어갔다.

 

동원F&B는 사람이 육안으로 찾기 어려운 통조림 속 가시와 이물을 AI로 검출하고 있다. 제품 디자인 평가에도 AI를 적용해 소비자 조사 비용과 제품 출시 기간을 줄이는 데 활용한다.

 

신제품 수요까지 AI가 예측한다. 동원그룹과 KAIST가 진행한 AI 경진대회에서는 소비자의 연령과 가구형태, 소득, HMR 선호도, 구매 후기 등의 데이터를 이용해 가상의 소비자를 만들고 신제품 구매 의사를 예측하는 모델이 개발됐다. 동원 측에 따르면 일부 모델은 95% 이상의 예측 정확도를 기록했다.

 

풀무원도 사내 반복 업무를 AI 에이전트에 넘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25년 전사 AX 전담 조직인 ‘AX혁신실’을 신설하고 생산·판매·유통·물류 전반에 AI와 자동화 기술을 확대하고 있다.

 

대표 사례가 사내 HR 업무를 처리하는 AI 챗봇 ‘두리번’이다. 직원들이 인사 제도를 질문하면 AI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월평균 약 600건을 처리한다. 풀무원은 이를 통한 연간 비용 절감 효과를 약 1400만원으로 추산했다.

 

가맹사업법과 하도급법을 다루는 법률 전문 AI 에이전트도 영업·구매·법무 부서에서 사용하고 있다. 회사가 밝힌 답변 정확도는 96% 이상이다.

 

전사 생성형 AI 서비스인 ‘풀무원GPT’의 활용량도 늘고 있다. 2025년 하반기 기준 AI가 처리한 업무량을 문서로 환산하면 A4 용지 약 170만장 규모라고 회사는 설명했다.

 

AI는 소비자 분석에도 들어갔다. 풀무원은 AI 리뷰 분석 시스템 ‘AIRS’를 전국 407개 풀무원푸드앤컬처 사업장에 적용했고, 미국에서는 월마트와 타겟 등 7개 주요 유통채널의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한 단계 더 나아가 AI를 ‘상품기획자’로 활용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이 자체 개발한 ‘Food AI 360’은 소비자 트렌드 분석부터 제품 아이디어 개발, 소비자 예상 반응 분석, 출시 이후 모니터링까지 신제품 개발 과정을 하나의 AI 플랫폼으로 연결한다.

 

AI가 온라인 소비자 관심 변화를 분석해 앞으로 유행할 가능성이 높은 식품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제품 콘셉트와 특징, 패키지 형태까지 제안한다. 제품을 내놓기 전 예상 소비자 반응과 개선점도 분석한다.

 

실제 제품도 나왔다.

 

지난 6월 출시된 ‘말차 햇반’은 AI 분석 과정에서 말차 트렌드의 지속 가능성과 건강 원료·간편식을 결합하려는 소비자 수요를 포착해 제품화한 사례다.

 

‘비비고 연어 스테이크’ 역시 AI가 단백질 식품 시장에서 소비자 관심이 기존 육류 중심에서 수산 단백질로 이동하는 흐름을 찾아낸 결과를 제품 개발에 활용했다. 해당 제품은 출시 반년 만에 판매량 140만개를 넘어섰다.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판매 현장에도 AI가 들어왔다. CJ제일제당은 자사몰 CJ더마켓에서 생성형 AI 기반 대화형 검색 서비스 ‘Fai’를 운영했다. 소비자가 “고단백이면서 저칼로리인 간편식”처럼 일상 언어로 질문하면 영양정보와 구매 후기, 검색 패턴 등을 분석해 제품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업계의 AI 도입 방향은 뚜렷하다.

 

초기에는 번역이나 보고서 작성, 사내 정보 검색처럼 직원 개인의 생산성을 높이는 ‘보조 도구’ 성격이 강했다. 이제는 수요 예측과 상품기획, 생산 품질검사, 물류 배차, 법률 검토처럼 기업의 핵심 업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특히 식품업은 원재료 가격과 소비 트렌드 변화가 빠르고 생산·재고·물류 관리가 수익성과 직결된다. 수요를 잘못 예측하면 그대로 재고와 폐기 비용으로 돌아오는 만큼 데이터를 얼마나 빨리 분석해 생산량과 신제품 전략에 반영하느냐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

 

관건은 ‘얼마나 AI를 많이 도입했느냐’보다 실제 비용과 시간을 얼마나 줄였느냐다. 결국 식품업계의 AI 경쟁도 보여주기식 챗봇을 넘어 수익성과 생산성 개선이라는 숫자로 평가받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