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면도기 시장의 경쟁 공식이 달라지고 있다. 얼마나 짧고 빠르게 수염을 깎느냐를 겨루던 데서 피부에 닿는 감촉과 자극,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맞춤 기능, 세척과 충전 편의성, 디자인까지 아우르는 ‘면도 경험’ 경쟁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매일 반복하는 면도가 단순한 수염 제거를 넘어 개인의 취향과 자기관리 습관을 보여주는 그루밍 영역으로 자리 잡으면서다. 주요 전기면도기 업체들도 절삭 성능만 앞세우기보다 피부 보호와 개인화, 휴대성 등 각기 다른 경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시장도 커지고 있다.
26일 시장조사업체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세계 전기면도기 시장은 2025년 141억7000만달러에서 올해 147억8000만달러, 2034년에는 223억1000만달러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5.28%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지난해 세계 시장의 40.29%를 차지해 최대 시장으로 나타났다.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는 피부 자극을 줄이는 기술과 압력 센서, AI 기반 개인 맞춤 기능 등이 프리미엄 시장 성장을 이끄는 요인으로 꼽았다.
이런 흐름에 맞춰 한국P&G 브라운은 최근 3세대 플래그십 전기면도기 ‘네보(NEVO)’를 선보였다. 브라운이 플래그십 전기면도기의 세대를 교체한 것은 12년 만이다.
1세대가 간편함, 2세대가 절삭력을 중심에 뒀다면 네보는 피부에 닿는 부드러움과 정교한 절삭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핵심은 ‘실크 쉐이빙’ 기술이다. 브라운 최초로 상어 피부에서 영감을 얻은 미세 엠보싱 구조의 ‘초저마찰 실크 글라이드 포일’을 적용했다. 회사 측에 따르면 기존 옵티포일보다 피부 마찰을 최대 24% 줄였다.
네 가지 커팅 요소를 사용하는 ‘콰트로 실크 커팅’ 기술은 여러 방향과 길이로 난 수염을 피부 표면 아래 최대 0.12㎜까지 절삭한다. 수염 밀도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네보 센스’도 적용해 부위에 따른 면도 편차를 줄이도록 했다. 브라운 역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저마찰 설계를 네보의 핵심 기능으로 내세우고 있다.
면도기 몸체에도 변화를 줬다. 부식과 고온에 강한 스테인리스 스틸 316L을 하이드로포밍 방식으로 성형해 일체형 바디를 만들었다. 배터리와 세척·날망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와 세척·건조·윤활·충전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7 in 1 스마트케어 센터’도 적용했다.
브라운은 신제품 출시와 맞물려 배우 공유를 새로운 브랜드 모델로 발탁했다. 지난 20일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브라운 신제품 네보 언팩 이벤트’에도 공유가 참석했다. 단순 제품 공개를 넘어 브랜드 역사와 디자인, 사용 경험을 함께 보여주는 체험형 마케팅에 힘을 준 셈이다.
경쟁사 필립스의 방향은 ‘개인 맞춤형 면도’에 가깝다.
필립스가 지난해 선보인 최상위 제품 ‘i9000 프레스티지 울트라’에는 ‘SkinIQ Pro’가 적용됐다. 민감·일반·강력 면도 등 다섯 가지 모드를 제공하고, 면도 중 사용자의 압력과 움직임을 감지해 적정한 방식으로 면도하도록 실시간 안내한다. 수염 밀도에 따라 출력도 자동으로 조절한다.
면도기가 단순히 사용자의 손을 따라 움직이는 기기에서 사용법까지 알려주는 일종의 ‘AI 면도 코치’로 진화한 셈이다.
필립스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전용 앱을 통해 피부 상태를 10개 지표로 분석하는 AI 피부 분석 기능도 갖췄다. 회사는 i9000 프레스티지 울트라에 적용한 트리플 액션 리프트 앤 컷 기술이 수염을 들어 올려 피부 표면 아래 최대 0.08㎜까지 절삭한다고 설명한다.
면도 이후 피부관리까지 영역을 넓힌 제품도 등장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i9000 프레스티지 울트라 데이 & 나이트 에디션’에는 3-in-1 딥클린 마사지기가 포함돼 있다. 면도 전후의 피부관리까지 하나의 그루밍 과정으로 묶은 제품이다.
파나소닉은 절삭력에 AI와 휴대성을 결합하고 있다.
파나소닉코리아가 지난해 내놓은 람대쉬 6중날 ‘ES-L690U’에는 ‘람대쉬 AI+’가 적용됐다. 수염의 밀도를 감지해 면도에 필요한 전력을 자동으로 조절하고, 사용자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면도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5중날 제품 ‘ES-L550U’와 함께 USB-C 충전도 지원한다.
올해 7월에는 방향을 더 틀었다. 면도 성능을 유지하면서 제품 자체를 손바닥 크기로 줄인 ‘람대쉬 팜인 라이트 ES-P330U’를 국내에 출시했다.
이 제품은 30도 예각 나노엣지 스테인리스 3중날과 분당 3만9000회 구동하는 리니어 모터를 넣으면서도 손바닥에 들어오는 형태로 디자인했다. USB-C 충전과 전용 세미 하드 케이스를 적용해 출장이나 여행 중 사용하는 상황까지 제품 설계에 반영했다. 국내 소비자가격은 24만9000원이다.
과거 프리미엄 면도기 경쟁이 ‘몇 중날인지’, ‘얼마나 깊게 깎이는지’에 집중됐다면 최근에는 같은 고성능 제품 안에서도 서로 다른 전략이 뚜렷해지는 모습이다.
브라운은 피부 마찰과 소재·디자인을 앞세워 부드러운 사용감을 강조하고, 필립스는 AI를 활용한 맞춤 면도와 피부관리로 범위를 넓혔다. 파나소닉은 수염을 감지하는 AI에 소형화와 휴대성을 더했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면도기는 한 번 구매하면 수년 동안 매일 사용하는 제품이라는 특성 때문에 절삭력 외에도 피부 자극이나 세척, 충전, 휴대성 같은 요소가 제품 선택에 영향을 주고 있다”며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앞으로도 얼마나 잘 깎이는지를 넘어 소비자가 면도 전후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얻느냐를 놓고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