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 관행 파괴한 이들이 관행을 말할 때

이해관계 따라 관례의 잣대까지 바꿔선 안 돼

성문법 국가에서 우선하는 것은 문자로 된 법이다. 그러나 국가 운영의 모든 원칙을 법조문에 일일이 적어놓을 수는 없다. 그 빈틈을 메우는 것이 불문율이다.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공동체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다. 관례는 법적 강제력을 갖는 규범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제도를 운영하며 형성된 방식이다. 그런데 최근 이 관례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꺼내 쓰는 도구가 된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관례는 단순한 전례로 치부해왔다. 선거의 규칙을 정하는 선거법만큼은 여야 합의를 중시해온 관행을 2019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을 배제한 채 패스트트랙에 올리며 저버렸다. 법사위원장을 야당이 맡아온 관행과 원내 의석에 따라 여야가 상임위원장 자리를 나눠온 관례도 2020년 깨뜨렸다. 2024년 22대 국회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장혜진 사회부 차장

수십년간 형성돼 온 검사의 수사권과 형사사법시스템 역시 ‘헌법에는 없는 권한’이라는 이유로 쉽게 허물었다. 헌법재판소의 2022헌라2 결정에는 ‘검수완박’ 입법 과정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재판관 4인은 민형배 의원의 탈당과 안건조정위원 선임으로 안건조정제도의 취지가 형해화됐다며, 국회법 위반을 넘어 헌법상 다수결의 원칙과 회의주재자의 중립성에 반하는 중대한 헌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이미선 재판관 역시 국회법상 하자를 인정했다. 무효확인청구는 기각됐지만, 다수결의 이름으로 입법 절차를 무력화한 흔적은 결정문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관례가 잘못됐다면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관례를 대하는 잣대까지 바꿔서는 안 된다. 불리할 때는 외면하고 필요할 때는 헌정질서의 원칙인 양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태도가 최근 대법관 제청을 둘러싸고도 반복되고 있다. 청와대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법관 서면 제청에 대해 “관행·관례를 벗어난 헌정사 초유의 상황”이라며 “대통령 임명권이 침해됐다”고 문제 삼았다. 민주당은 한발 더 나아가 “헌정과 법치 파괴”라며 대법원장 탄핵까지 거론한다.

 

헌법 제104조 2항은 대법관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할 뿐, 제청에 앞서 대통령과 협의 또는 합의해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는다. 사전 협의라는 관행을 존중하는 것과, 이를 대법원장의 제청권 행사를 위한 헌법상 선행조건으로 격상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더욱이 청와대가 대법원의 반대에도 특정인의 제청을 사실상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대통령의 임명권 행사를 넘어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윤석열정부는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후임 인선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혀 논란이 됐지만, 대법관 공백을 장기화하면서까지 특정 후보 제청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제가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이라며 “대법관 임명할 때 ‘누구 해달라, 대통령이 임명 안 한다’ 이런 반헌법적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던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이제 “안 나가면 탄핵”이라며 조 대법원장을 압박한다.

 

헌정 관행은 헌법의 빈틈을 보완할 수 있지만, 헌법의 문언을 거슬러 헌법상 권한을 제약할 수는 없다. 명문의 헌법상 권한을 행사한 대법원장을 향해 ‘관행 미준수’를 이유로 탄핵을 들먹이는 것은 관행을 헌법보다 앞세우는 주장이다. 관행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꺼내 드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