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도파민 나와요”…용산 ‘오타쿠 성지 투어’ 직접 돌아보니 [29면]

아이파크몰서 개인 굿즈숍까지 핫한 용산 ‘덕질 코스’
비주류서 ‘대세 콘텐츠’로, 사람 모으는 ‘마니아의 힘’
세계일보 신규 유튜브 코너 <29면>은 지면 너머의 현장을 포착하는 콘텐츠다. 기사 한 줄로는 다 전하지 못한 사실부터 미처 묻지 못한 질문,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는 현장의 이면까지 텍스트 너머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한다.

 

 

“아무래도 중독된 것 같아요. 용산에 오는 걸 끊을 수가 없어요.”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 3층 ‘도파민 스테이션’. 매대마다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피규어, 굿즈가 빼곡했다. 한 매장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한참을 기다려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쇼핑백을 든 사람들은 매장 곳곳을 누비며 다양한 굿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름처럼 곳곳에서 ‘도파민’을 자극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18일 오후 서울 용산역 아이파크몰 3층 도파민스테이션에서 고객들이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변하윤 인턴기자

 

김민구(35)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도파민 스테이션이 ‘핫하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아이파크몰을 찾았다. 이날 그는 당초 사려고 했던 포켓몬 제품들과 함께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피규어도 샀다. 

 

김씨는 두둑한 쇼핑백을 자랑하며 “한국에서 이런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 팝업스토어나 굿즈 매장이 많이 늘었다”며 “저처럼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피규어를 살 공간이 많아져서 좋다”고 말했다.

 

경기 성남시에 사는 차정원(20)씨는 친구에게 줄 선물로 캐릭터 굿즈를 골랐다. 그는 “우리 세대는 이미 오타쿠 문화가 많이 알려져 있어 어색하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며 “옛날보다 관심 있는 캐릭터 상품을 살 곳도, 놀 거리도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 한때 일부 ‘오타쿠’들의 비주류 취향으로 여겨졌던 콘텐츠가 이제 사람들을 오프라인 공간으로 불러들이는 ‘집객 카드’로 떠올랐다. 좋아하는 콘텐츠를 찾아 굿즈를 사고 직접 체험하는 팬들이 늘면서 백화점과 복합쇼핑몰도 이들을 겨냥한 ‘취향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도파민 스테이션은 캐릭터와 피규어, 게임뿐 아니라 키보드와 라이프스타일, 먹거리 등 다양한 취향을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공간을 넘어 각자의 취향을 구경하고 즐기는 공간인 셈이다.

 

아이파크몰 관계자는 “아이파크몰 하면 ‘덕후의 중심지’라고 보는 분들이 많은데, 저희가 주목한 건 서브 컬처나 특정 콘텐츠 자체보다는 마니아의 힘”이라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한번 모아보자고 해서 콘텐츠를 다양하게 늘려나가고 있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온라인에서 용산의 ‘오타쿠 성지’를 소개하는 투어 코스 영상이 잇따라 공유되고 있다. 유튜브 ‘휘피위피 스튜디오’, ‘희구리재구리’, ‘와글와글치’, ‘아이스아메리’ 캡처

 

아이파크몰을 중심으로 형성된 ‘덕질’의 동선은 쇼핑몰 밖으로도 이어진다. SNS와 유튜브 등에서는 아이파크몰과 용산역 인근의 개인 굿즈숍 여러 곳을 한데 묶은 ‘용산 오타쿠 성지 투어’가 공유되고 있다. 어느 매장을 어떤 순서로 돌아야 하는지 동선까지 정리한 이른바 ‘덕질 코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용산역 인근의 한 굿즈 매장에서 만난 황윤주(30)·황지수(24)씨도 이런 방식으로 용산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파크몰에서 쿠지(제일복권)를 하고 오락실에서 인형을 뽑은 뒤 인근 개인 굿즈숍까지 돌았다. 원하는 캐릭터를 얻기 위해 같은 가챠(뽑기)를 세 차례 연달아 하기도 했다.

 

황씨는 “용산은 다른 곳보다 가챠나 귀여운 상품이 많고, 대형 쇼핑몰에서 개인 매장까지 가까이 모여 있어 주기적으로 온다”며 “아무래도 중독인 것 같다. 진짜 도파민이 오는 게 있어서 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18일 오후 서울 용산역 인근 한 굿즈숍에서 고객들이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변하윤 인턴기자

 

인근에서 굿즈숍을 운영하는 노유정(28)씨도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노씨가 2023년 용산에 처음 매장을 열 당시만 해도 주변에 애니메이션 굿즈숍이 거의 없었다.

 

그는 “없는 시장에서 시작해보자는 생각으로 용산역 앞에 가게를 냈는데 최근 들어 애니메이션 굿즈 매장이 많이 생겼고, 도파민 스테이션이 생긴 이후 손님들이 더 모이는 것 같다”고 했다.

 

공간이 변하자 오타쿠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애니메이션과 게임, 캐릭터 굿즈가 일상적인 소비와 놀이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오타쿠냐 아니냐’를 가르는 경계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취향 콘텐츠와 팬덤이 결집하면서 각자의 취향을 예전보다 훨씬 더 드러내는 시대가 됐다”며 “서브 컬처라는 개념도 이제 ‘소수’라는 의미보다는 각각의 취향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때 일부 마니아들만의 문화로 여겨졌던 ‘덕질’. 이제는 사람을 모으고 지갑을 열게 하면서 지역의 모습까지 바꾸고 있다. 전자제품을 사러 가던 용산에 이제는 ‘취향’을 찾는 사람들이 모인다.

 

오타쿠 성지로 떠오른 용산의 생생한 현장과 덕질 코스는 세계일보 유튜브 <29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